용산 철거민 강제진압 희생자들을 추모합니다


2002년 10월, 그냥 있을 수 없다

마음에 남은 풍경/amy 길 떠나다 2003/09/28 09:00
함께 아시아세미나를 하던 선배들이 신기하게도 10월에 맞추어 제각기 런던, 방콕, 도쿄, 홍콩, 네덜란드로 떠나는 것을 보자, 문득 나에게도 어딘가 꼭 가야만 할 곳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런 것을 놓고 부화뇌동이라고...-_-;; 어쨌거나 그렇게 천년의 숲 함양 상림으로 가게 된 amy.

장면 1. 광안리 해변.

길을 떠나면 꼭 들러야 하는 곳이 있다. 나의 부모님이 계시고, 친구들이 있으며 고등학교때 줄곧 내 피난처가 되어준 바다가 있는 부산.

광안리에는 이번에도 계획에 없던 발걸음을 했다. 2호선을 타면 나도 모르게 집을 지나쳐 그곳까지 가게 된다. 지하철 역을 빠져나와보아도 도시의 어느 모퉁이와 다를바 없는 길이 나오지만 조금 걷다보면 예기치않게 갑자기 펼쳐지는 그 바다는, 아직 공사중인 광안대교가 흉하게 가리웠어도 여전히 푸르게 숨쉬고 있었다. 우힛. 편의점에서 산 일회용 카메라. 과연 얘가 나의 좋은 여행친구가 되어줄런지.. 어쨌든 우선 바다부터 한 컷.



나는 조금 걷다가 이내 백사장에 주저앉는다.
처음에는 폼 잡고 얌전히 앉아 있었지만 어느새 신발을 벗고, 양말을 벗고,
모래 속에 발을 묻어보았다.
흐음... 역시 발가락 보다는 모래가 훨 이쁘다.



모래는 부드럽고,
모래는 흘러내리고,
모래는 반짝반짝 피부에 달라붙지요.

그러고 이제는 모자를 둘러쓰고 아예 벌렁 누워 버린다.
안경까지 빼 버리고 나니 온통 크고 둥근 하늘만 눈앞에 가득하다.
눈 감고 파도소리 들어보기.
비둘기, 갈매기, 강아지, 어린 아이가 그런 나를 기웃거리며 차례로 지나가고.
그냥 잠들고 싶을 정도로 좋은 느낌.

언니가 챙겨넣어준 배즙을 꺼내 먹었다.
누워서,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먹기 위해 투쟁!



먹고난 배즙 포장지 너머로도 하늘은 보인다.
과일 그림들이 하늘에 총총 박혔다.



장면 2. 함양 상림 첫째날

아침나절. 버스는 그냥가지 않는다. 버스는 진주에서 나를 떨구었다. ㅡㅜ 그래서 함양까지 두시간...

그림이 흐리게 나와서 너무 아쉽지만, 이 끝없이 뻗어있는 길이 바로 들어선 순간부터 무려 세시간이나 나를 잡고 있었던 아름다운 숲의 초입이다.



날씨가 흐렸는데다 나무들의 키가 커서 빛이 별로 많지 않았다. 그래서 공기는 더 촉촉했고 땅은 부드러웠다. 상림은 원래는 더 큰 숲이었고, 천년이 더 넘은 인공림이라고 했다. 나무들은 모두 활엽수이고 다람쥐들이 좋아하는 갈참나무가 대부분이어서 간간이 수확하느라 바쁜 그네들(^^)을 볼 수 있었다.

두 손과 허리아래를 모두 잃은 채 시멘트 위에 겨우 서 있는 이 불상은, 그 옆에 세워져있던 안내판에 의하면 고려시대 망가사에 있던 '이은리 석불'이라고 한다.



너무 외로운 그림인데... 나중에 돌아올 때 보니 그 앞을 지나던 여인들이 머리를 깊게 숙여 두 손을 모으더군. 아하.. 여기 서 있는게 그리 외로운 것만도 아니구나. 그들은 이 석불에 무어라 기원을 올렸을까. 종교적 이질감은 때론 간단한 공감을 어렵게 한다. 나는 그냥 가만히 서 있다가 미련없이 발길을 재촉했거든. -_-v

이곳에서 흐르는 물은 어찌 그리도 맑은지.

너무나 오랫동안 도시의 물과 관광객들이 흐려놓은 계곡과
부산스런 항구의 바닷물만을 보다가
이렇게 조용하고 깨끗하게 흐르는 물을 보니 어찌나 맑고 새로웁던지.

상선약수 상선약수...
벅찬 마음에 그림으로 어떻게 잘 담아보려 애씀.



그 모래와 그 물결이 여기서도 잘 보이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언제나 사진과 기억이라는 것은 항상 사물 그 자체를 변형시키고, 오염시키는 것 아닌가. 다시 보고 싶으면 다시 가 보아야 할 일이다. 그리고 다시 보면, 아마도 포착하기는 어려운 미묘한 변화가 그 안에서도 계속 되고 있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시내를 건너고 돌길을 건너니 난데없이 숲 바깥으로 '역사인물공원'이라는 곳이 나타났다. 머릿돌에 2000년이라고 되어있으니 아주 최근 조성된 곳이다.

주루룩 늘어선 흉상들은 함양 근방에서 족적을 남긴 인물들.



최치원 선생을 지나 무심히 거닐다가 연암 박지원을 올려다보았을 때,
그 눈은 무언가 분명한 메세지를 전하는 듯하여 조금 놀라웠다.
그 공원... 아무도 없었는데 말이다.



내가 그날 숲에 들고간 책이 썩 그곳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네모진 목재들이 가지런히 누워있는 길 위에 서 보니
아래쪽에 작고 곧은 풀 한 포기 보이고,
손에 있던 책들을 내려놓고 쪼그려 앉으니 풀잎 사이의 촉촉함도 느껴졌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아 풀밭도 가장자리의 흙도 발이 쑥 들어가게 푹신해서 오히려 맘껏 걷기가 망설여지는터라, 잠시 벤치에 앉아서 상림의 왼쪽 얼굴을 가만히 살펴보았다. 밖에서 보는 숲은 안에서와는 또 완전히 다른 모양새를 띠는 것이...

그리고 얼마 못가서 상림은 다시 나를 그 속으로 불러들였다.



왜,
나무는 나이가 들면서 속이 비어가는 걸까?
이 나무는 무척이나 나이가 많아보였는데,
이미 위쪽의 가지도 반절만 남아있는데다
몸통은 비어 버린지 오래여서
무척이나 마음이 쓰이는 것이었다.

뒷모습이 나무와 함께 찍힌 저 아저씨는
내가 이 나무를 보고 있을 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나무를 볼 줄 아는가보다고. (헹~^^;; )


숲 외곽에 자리를 잡은터라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는 이 나무가 이렇게 사랑도 받지 못하고 죽어 버릴까 걱정이라는 그 아저씨는 함양에서만 쭉 살아온 토박이었는데, 이것저것 내 신상도 묻고 자기 가족 이야기도 풀어놓으며 대화를 시도했다. 별로 수다를 떨고 싶지 않았던 나는 간단히 대답하고 웃음으로 때우곤 했지만, 그 아저씨는 자식 결혼시킨 이야기까지 줄줄이 늘어놓으시더니 한 이십여 분이 지나자 일할 시간이 다 되었다며 벤치에서 일어나셨다. (아저씨는 몇년 전 조기퇴직 후 중학교 야간경비를 서고 있다고 했다.)

우연히 마주친 아저씨와의 짧고도 긴 대화를 통해, 나는 상림이라는 곳을 지역주민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개발과 보호, 휴식과 생계. 누구도 큰 목소리로 보호해내지 못하지만 결국은 모두가 후회한다. 개/발/.

이번에는 숲의 오른쪽 바깥을 걸어보았다.
그쪽에는 논이 많아서 온통 황금빛 들녘이 펼쳐져 있었다.



빗방울이 내리기 시작한 터라 고개숙인 벼들은 한층 더 신선한 느낌을 주고 있었고,
나는 이렇게 온 힘을 다해 열매를 맺어놓은 벼들에게
고생했다고, 멋지다고 인사를 하고 싶었다.

어쩌면 이 벼들이 농약으로 커 온 것보다
내가 물질문명으로 커 온 것이 훨씬 반자연적인 것이 아니었을까.


오른쪽에서 다시 들어가는 숲 어귀에는 또 다른 작은 시내가 흐르고 있었고, 그 위를 덮으며 둥글게 뻗어내린 나무들(뭔 나무인지는...)이 우아한 그림을 만들고 있었다. 그 시내를 건너는 작은 다리 위에 한참을 서 있었다.


.
물소리 가득.

물레방아의 삐걱이는 소리와
찰랑거리는 소리.
새소리.
아무도 없는 숲 속의
아주 신선한 냄새.


비가 올 뿐 아니라 날도 많이 어둑해져서 어느틈엔가 몸은 추위에 굳어지고... 지난 밤 열차 안에서 했던 많은 혼란스런 생각들이 다시금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런 생각들은 머리를 흔들어도 떨어져나가지 않는다. 그저 얼른 숲을 벗어나 읍내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읍내로 향하면서 시계를 보니 여섯시 무렵. 무려 세 시간이 넘도록 이곳을 휘젓고 다녔던 모양. 그러자 몹시 배가 고파졌다. ^^


장면 3. 함양 상림 둘째날

밤새 비내리고 막 개이려 하는 아침에 또 한번 숲을 향했다.

상림은 원래 하천이 함양 마을 안으로 범람하는 걸 막기 위해서 둑을 만들어 물길을 돌리고 그 위에 조성한 숲이라고 했다. 그런데 숲 아래쪽(하림)은 이미 개발로 거의 없어져 버렸고 그나마 보존되어 있는 상림과 하천 사이에는 2차선 국도가 나 있어 종일 차들이 지나가는, 천연기념물 대접으로는 영 부적절한 환경이었다. 하천도 콘크리트의 침입을 조금 받긴 했지만 그나마 자연생태계를 유지하는 선에서 가꾸어지고 있는 듯하여 다행.

둑 아래로 내려가 위쪽으로 걸으면서 한번, 다시 돌아내려오면서 한번 상림을 담아 보았다.





역시 눈깜짝할 사이에 숲 근처에서 두시간이 훌쩍 지나고, 나는 버스를 놓칠세라 읍내 끄트머리에 있는 터미널을 향해 돌진했다. 아.... 벗어날 수 없는 속도. 속도. 출발 3분전에 표를 끊어 겨우 올라탄 버스는 뒤돌아보는 내 마음은 전혀 모르고 함양을 미련없이 벗어나더니 그래도 뜻하지 않게 거창, 안의, 농월정을 지나는 수려한 경관을 보여주어 적잖은 위로가 되었다.


마지막 장면. 돌아온 amy

흐린날에 상림에 가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놀러갈 때 비가 오는 것만큼 우울한 건 없다고들 하지만,
비오는 날에 맞추어 비오는 풍경을 보려고 하면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푸른 바다, 푸른 하늘, 푸른 숲.
안개에 휘감긴 산허리와 밤새 빗물에 씻겨 내려가는 물줄기.

이런 모양 저런 모양 감추지 않고 보여주며,
속도의 차이를 잊게 해 주고,
혼잡한 듯 늘 질서정연한 자연을 만나는 것이
인간인 나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살아가는 힘이 된다는 것을,

이렇게 밤새워 하잘 것 없는 기록을 남기고 있는 나를 보며 다시 한번 깨닫는다.


2002년 10월, a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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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바람이 2003/09/30 09:00 수정/지우기 REPLY

    10월..또 그녀는 여행을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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