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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여성활동가⑨] 평화와 인권, 여성의 이름으로 개혁을 외치다 - 시린 에바디

삽질로 빚은 이야기/세계의 여성활동가 2005/11/14 09:00
환경정의 격월간지 우리와다음 (2005년 11-12월호)에 보낸 글입니다.

평화와 인권, 여성의 이름으로 개혁을 외치다 - 시린 에바디
생태적 감수성으로 세상을 바꾼다 - 세계의 여성활동가들 ⑨

혁명의 주인공들이 돌아왔다. 이 혁명은 서구에 의한 일방적인 개방과 경제적 침략에 맞서 고유의 문화와 체제를 수호하겠다는 숭고한 의의를 내걸고 이미 20여년 전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던 화려한 혁명에 대한 일종의 반추, 아니 재탕이랄 수도 있겠다. 지난 6월, 개혁주의자들의 보이콧을 우습게 물리치고 집권에 성공한 강경보수파 출신 대통령 아마디네자드는 집권 후 그간의 개혁 정책들을 백지화하고 특히 핵 문제 있어서 강경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국제사회에는 논란을, 국내에서는 다수의 지지세력을 확보해나가는 중이다.

1979년, 호메이니의 집권으로 시작된 이란의 이슬람원리주의운동은 좌파와 학생운동세력 등 이란 사회의 주요 운동세력의 지지를 받으며 광범위한 기반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한편, 권력의 성질이 어떻게 달라지든 대개의 경우 억압의 최전선에 서기 마련인 여성들에게 있어서 이란혁명은 또다른 재앙으로 다가왔다. 여성의 대외활동 뿐 아니라 신체에 관해서도 지극히 까다로운 잣대를 들이대는 이슬람원리주의 하에서 그 혁명이 이룬 커다란 ‘성과’ 중 하나는 바로 공적인 영역에서 여성의 활동을 원천봉쇄하고 히잡과 전통의상으로 여성을 집 안에 가두는 일이었다. 그렇게 정당한 사회적 역할 뿐 아니라 자신의 몸에 관한 권리까지도 차단당한 수많은 여성들 중에 시린 에바디(Shirin Ebadi)도 있었다.

1947년 이란 북서부 하메단(Hamedan)의 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에바디는 테헤란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곧바로 법관임용시험을 통해 사법부에 재직하게 되었으며, 이란 역사상 최초의 여성재판관으로 재직하기도 했다. 그러나 1979년 이란혁명이 성공한 이후, 이슬람이 여성을 법관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부가 모든 여성 법관의 직위를 해제하고 사무직 또는 서기로 발령을 내자 에바디는 저항했지만 결국에는 사직을 하고 법복을 벗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변호사 자격을 얻어 개업한 후 인권, 아동, 여성 관련 민감한 사안들을 지속적으로 맡아 변호하면서 인권변호사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97년 대선에서 이란혁명 후 집권해온 강경보수파를 누르고 개혁파가 승리를 거두자 에바디, 그리고 이란 여성들이 처한 상황도 조금씩 나아질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공화국을 형성하면서 이란혁명 체제가 만들어놓은 사회적 장치들은 정권이 바뀌어도 여전히 견고한 틀을 유지해나갔고, 신정부의 개혁정책 또한 초기의 기대와는 달리 지지부진할 따름이었다. 그러한 와중에 이란 사회의 민주적 개혁을 지지하며 인권문제, 특히 여성 및 아동에 대한 국가폭력 문제를 지속적으로 파헤치던 에바디는 정권교체 후인 1999년에도, 그리고 2000년에도 체포와 투옥, 석방을 반복적으로 경험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어느새 시린 에바디는 이란 개혁세력의 대표적 인사로 각인되기 시작하였고, 국제적으로도 그 역할을 인정받아 결국 2001년에는 노르웨이의 라프토 인권재단이 수여하는 ‘라프토상’을 수상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2년 후 시린 에바디의 이름은 유럽 뿐 아니라 전세계적 주목을 받게 되는데, 이슬람출신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장본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시린 에바디 공식


http://www.shirinebadi.ir/

개혁을 지지하는 여성인권변호사로서 정부 및 집권층에 비판적 태도를 취하긴 했어도 시린 에바디는 무슬림으로서 자신의 신앙을 버린 적이 없었다. 그런 에바디가 전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노벨평화상 수상식장에 히잡을 쓰지 않은 채로 나타나자 안그래도 노벨평화상의 정치적 의미에 의혹을 제기하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던 이란 보수파와 주요 언론들은 격렬히 비판을 하거나 아예 외면하는 방식으로 에바디를 깎아내렸다. 이란 국내에서는 자국민은 물론 외국인에게도 예외없이 법적으로 강제되는 머리수건 히잡은 여성을 억압하는 분명한 장치이긴 하지만 태어나면서부터 체화된 관습으로 그것을 받아들여온 많은 이란 여성에게는 억압 이전에 전통적이고 문화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기도 하다. 그 때문에 에바디의 이러한 행동은 비단 보수파뿐 아니라 많은 이란 여성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노벨평화상 수상 이후 특강을 하러 들른 한 대학에서는 교문앞에 운집한 여학생들로부터 계란세례를 받기도 했으니 말이다.

“평화는 매우 근본적이자 인간의 지고한 권리로, 평화 없이는 표현의 자유나 정의 같은 그 어떤 권리도 무의미하다."
― 2005년 4월 태국 상원 연설에서 민주주의와 소수민족 권리 수호를 강조하면서. (UPI/연합)

돌아온 혁명가들, 현재 이란 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강경보수파는 핵문제와 관련 전 정부의 합의사항을 모두 무효화한 채 IAEA와 미 행정부를 강력히 견제하고 있다. 이와 관련 최근에는 한국 정부가 IAEA 결의에 동조한 것을 비난하며 한국제품에 대한 일방적 금수조치를 내리기도 했다. 또한 이란 뿐 아니라 주요한 이슬람 지역의 반미정서를 자극하면서 ‘이스라엘 제거’ 발언을 내놓는 등 강경일로를 걸으며 지지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반면 2004년 총선과 2005년 대선에서 연달아 패배한 개혁세력은 성직자들로 구성된 최고권력기관인 헌법수호위원회와 같이 강경파가 장악하고 있는 무수한 사회적 장치들을 집권기간내에 개혁하지 못함으로써 앞으로 상당기간 고전을 면치 못할 것으로 보인다. 노벨평화상 수상으로 국제적인 주목을 받게 됨으로써 어느정도 개혁의 상징적 역할과 함께 강경보수파를 견제할 힘을 얻게 된 시린 에바디 역시 지난 총선과 대선 국면에서 투표 보이콧을 넘어서는 의미있는 개혁의 물결을 만들어내지 못하였다. 인권변호사로, 또 여성운동가로 투신해온 에바디의 활동이 정당한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보다 구체적인 풀뿌리 수준에서의 결집과 지도력이 동반될 필요가 있어보이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최근에는 공들여 쓴 자신의 회고록을 이란 국내에서 뿐 아니라 이란에 대한 경제제재를 이유로 미국에서까지 출판을 금지당한 시린 에바디. 현재의 위기를 넘어 스스로의 목소리로, 그리고 고통받는 많은 여성과 아이들의 목소리로 세상의 변화를 이루어갈 그 날이 곧 다가오기를 기대해본다.

2005.10

<사진>
시린 에바디 공식 웹사이트 http://www.shirinebadi.ir/

<참고자료>
노벨재단 공식 웹사이트 http://nobelprize.org
라프토 인권재단 공식 웹사이트 http://www.rafto.no
위키피디아 http://en.wikipedia.org/
영 언론사 BBC http://news.bbc.co.uk
연합뉴스 http://www.yonhap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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