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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를 피해 숨은 도서관에서 만난 책들

삽질로 빚은 이야기/책꺼풀 이야기 2007/04/02 23:48
저는 여행길에 비가 오는 것도 좋아하고, 강풍이 불거나 태풍이 몰아치는 것도 좋아합니다. 생명에 위협이 되지 않을 정도라면 아무래도 맑은 날 한결같은 그런 모습이 아닌, 거기 사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를 특별한 경험을 공유하게 되는 거니까요.

하지만 황사라는 건... 아, 정말 꽤 무서웠어요. 왠만해선 그냥 나돌아다녔을텐데 이번 황사는 한눈에 보기에도 너무 심해서 일요일 아침나절, 이번에 충주까지 저를 초대하고 재워준 분이 아르바이트로 나간다는 도서관에 쪼르르 따라가선 하루종일 거기서 책을 읽다 올라왔습니다. 작년 제주에서는 도서관 바로 앞에서 그냥 발길을 돌렸었는데, 황사 덕에 충주에선 나름대로 호강도 해 보았네요.

뽑기감이 이만하면 괜찮았달까.

뽑기감이 이만하면 괜찮았달까.

어느 도서관이나, 장서가 많든 적든 간에 오직 거기서만 만나고 느낄 수 있는 책들이 있는 거지요. 오랜만에 잡히는 대로 쌓아두고 읽는 놀이를 했는데 일어서기 전에 찍어둔 사진을 보니 유독 전통가옥에 관심을 가졌던 날이었나봅니다. 그리하여 오늘은 다이제스트판 책꺼풀 이야기!

나쓰메 소세키에서 무라카미 하루키까지
일본에 관심이 없을때부터 유독 인상적으로 읽은 소설이 많았던 아쿠타가와賞의 주인공 아쿠타가와가 가졌던 신경증, 그가 신경증 때문에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자 그 이름을 기려 문학상을 만들었던 기쿠치 칸, 자신은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만한 자격이 없으며 일본에 그럴만한 사람은 얼마든지 많다고 했다는 가와바타 야스나리, 의도하지 않은 작가의 길에서 재능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 나쓰메 소세키... 읽기는 그 즈음에서 멈춤. 무라카미까지는 애써 따라가지 않았다. 좋은 기획이지만 너무 진부한 전기위주의 글로 채워져있어 아쉬웠다.

곰에서 왕으로
감히 911을 '문명과 야만의 싸움'이라고 단정짓는 야만적인 미국사회를 비판하며 시작하는 나카자와 교수의 강의. 환태평양 지역을 중심으로 자연과 대칭관계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온 인간들의 이야기를 인류학적 바탕에서 풀어가는데, 초반 인용된 미야자키 겐지의 우화처럼 문명의 덮개 아래 숨겨놓은 야만의 얼굴을 드러내고 인간과 동물, 자연의 관계를 회복시키려는 목소리가 강렬하다. "너희의 행동(북극곰의 테러)은 지당하다. 하지만 더 이상 법에 어긋나게 살지 않도록 주의시킬터이니 이번만 넘어가다오." 인류에게 이런 기회는 과연 언제까지 허용될런지.

명묵의 건축
요즘처럼 한자에 관심을 갖게 되기 전이었다면 꽤 지루해했을지 모를 글이었다. 명문은 명문이되 조금만 가볍게 풀어써주었다면 어땠을까. 스님의 사진은 시야가 꽤 넓고 깊었다. 추천사에서 '달밤에 불국사 기둥을 껴안고 울었다는 건축가나, 무량수전의 배흘림 기둥에 감동하는 미술사가의 感傷을 벗어나야..'라는 구절이 재미났다. 누구나 알만한 사람을 알만한 이야기로 '까는' 게 재미났던 걸까. 여튼 한번 보고 말 건 아니고, 가능하면 곁에 두고 가끔씩 꺼내보고 싶은 책.

한마디로 대학교재. 한옥의 건축양식, 공간구조, 기능, 문화, 생활까지를 전체적으로 평이하게 설명해 주었다. 꽤 눈길이 갔던 부분은 가부장 아래에서 각 공간을 차지하는 구성원의 위치에 대한 설명이었다. 별당아씨는 왜 별당아씨인지, 안방은 누가 언제 차지하게 되며 어떻게 떠나게 되는건지. 갓 태어난 아기가 건넌방에서 안방을 거쳐 사랑방이나 웃방에서 자라나서는 결혼 후 다시 건넌방에서 시작하게 되는 과정이 특히 신기했다. 대단한 체계.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건축의 역사
고르면서도 그리 달갑지 않았던 책. 펼쳐보니 출판사는 그 이름도 당당한 시공사. 음.. 사진들은 볼만했어도 마음도 떠나고 시간도쫓겨 몇장 넘기다 덮음. 건축의 역사라기 보다는 역사적으로 알려진 거대 건축물 모음집 정도로 해 두자.


초가

그냥 왠만한 사진집이거니 하고 집었지만 의외로 굉장한 보물을 발견. 작가가 70년대부터 '미친놈 소리 들으며' 10여년간 찍어온 초가 사진을 또 10여년 갈무리해 내놓았다는 이 책. 그 속에는 유신이나 반공이라거나 새마을운동이라거나 하는 단어로만 기록된 시대에 실은 가난과 추위에 찌들어도 소박하고 행복하게, 희망이 담뿍 담긴 미소를 머금으며 진짜 살아있던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초가는 그렇게도 앞에서 보나 위에서 보나 정겨웠구나. 정겨운 초가삼간에서 양친부모 모시고 천년만년 살아가자던 민심을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백년만 살면 되잖겠냐고 강요해댄 그때 그 사람들의 몰지각함에 쓴웃음. 그리고 쓰러져가는 초가집 앞에서 막 빼입은 양복 허리춤에 턱하니 손을 올린 채 카메라를 바라본 어느 멋쟁이 총각의 의기양양한 표정에 함박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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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sh 2007/04/03 17:54 수정/지우기 REPLY

    요즘 (이런 생각을 할 자격이나 있는지 모르겠지만) 최고의 학문은 '건축'이라는 생각을 하거든요. 이상과 실제의 가장 아름답고도 실용적인 조합이라는 생각에..ㅋㅋㅋ;;;
    건축 관련 책들 좀 읽어봐야겠다는 생각만 몇 달째이고..실제는....ㅠ
    음..주말에 황사가 심했다고 하대요.
    나름 르네 마그리트전에도 가고 그랬는데 전 전혀 황사인 줄 몰랐어요.
    어제 전화 영어 샘이 황사가 심했다고 그래서 주말에 황사가 심했다는 걸 알았다니까요. 흐유~

  2. ash 2007/04/04 10:49 수정/지우기 REPLY

    르네 마그리트 전은...
    아우!
    사람이 너무 많아서 완전 사람에 휩쓸려 다녔어요.
    그리고 그림은 잘은 모르지만..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 랑요,
    이 사람이 3, 40년대 포스터를 많이 그렸는데(여자들 단발 빠마 머리에 눈썹 가늘게 그린 그런포스터) 그게 참 예쁘더라구요. 그리고 노동조합 포스터도 그렸는데 예상치 못한 것이라 그랬는지 그것도 좋았구요.
    황사는 yellow sun storm이래요.

    • amy 또는 신비 2007/04/05 15:04 수정/지우기

      황사가 옐로썬스톰이라.. 표현이 많이 다른걸.
      황사는 모래바람이 불진 않는데 말이지?
      그럼 일본어로 하면 키로이 아라시가 되나?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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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시바타 쇼

삽질로 빚은 이야기/책꺼풀 이야기 2003/09/20 09:00
"나는 그 즈음 헌책방에 자주 들렀다.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막연히 눈에 들어오는 책을 손에 들고 시간을 보내곤 하였다. 어느 때는 겉표지만 보면서 삼십 분이나 한 시간을 허투루 흘려보내곤 하였다. 그런 경우 나는 제목을 읽는다기보다 누렇게 변한 종이나 빛 바랜 글자, 닳아버린 책 귀퉁이나 손때 묻은 얼룩, 그 밖에도 그 책이 갖고 있는 그림자라고 할 수 있는 이런저런 것들을 들여다보곤 하였다. 그건 무의미한 '시간보내기'였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일 중에 시간보내기 말고 별다른 게 있을까. 다행이랄까, 나는 나름대로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편에 속했다."

훗. 처음으로 올리게 된 책의 제일 첫 장에 쓰여진 글이 책꺼풀 에피소드의 성격과 딱이다.

도서대여점에서 발견할 수 있는 책이라는 것은, 환상의 만화책들 빼고는 죽어라 노력해봤지만 빠져들지 않아 반권도 못읽고마는 무협지가 절반이고 약간은 夜하다고 알려진 책들, 그 다음으로 유명한 성공담이며 소설들. 며칠전, 그 중 '유명한 소설'을 한 권 빌려읽고 연체료 물며 돌려주면서 빈손으로 가기 허전해 무심결에 집어든 책이 시바타 쇼의 "청춘"이었다.

"젊은 시절에는 저마다 마음속에 '성서' 하나씩을 품고 있기 마련이다"

성서? 앗. 나는 없잖아. ㅠㅠ

그런데 뜻밖에도 이 책에는 일본 50-60년대 학생운동에 몸담았던 젊은이들의 사랑이야기가 담겨있었다. 첨엔 결혼을 앞둔 후미오와 세츠코의 까닭모를 부담감, 두려움...뭐 그렇게 시작하더니만. 그러니까 신비는 그만 속고 만 것이다.

시위중에 도망쳤던 경험 때문에 자신을 배신자로 규정하고 괴로워하며 운동을 떠나 살다가 결국 자살한 사노, 열정적으로 서클후배인 자신을 지도하던 노세를 사랑했지만 당의 명령으로 무장투쟁을 위한 잠수에 들어갔던 그가 당이 실패를 선언한 후 돌아와 절망과 무기력을 드러내 보이자 그만 사랑이 식어버리고 운동에도 흥미를 잃고 만 세츠코. 단지 열정으로 시작한 관계에서 마음을 온전히 열지 않는 그를 원망하며 자살한 유우코를 통해 발견한 삶의 허무에 짓눌려 살아온 후미오.

고등학교때 사노와 노세는 학급회의중에 이런 대화를 한다.

"한국전쟁은 한국 독재자 이승만과 독재자를 지원하는 미제국주의자가 일으킨 전쟁입니다. 그 증거는 전쟁 시작 일주일 전에 덜레스가 38도선을..." ...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야."

오호라. 일본 공산당은 한국전쟁을 진정 이렇게 보았단 말이냐. 게다가 고등학교 학급회의에서 이런 토론을... -_-;;

지금 일본의 사회운동이 갖고 있는 면모를 생각해보며 소설을 읽다보니 문득 "80년대 변혁운동가들의 정체성 변화과정-운동권출신 여성모임을 중심으로"(박현귀 - 읽을사람 누르셥^^)라는 논문에서 본 인터뷰가 생각났다.

"재작년(94년) 같은 경우, 공지영의 {고등어}, 최영미 시집({서른, 잔치는 끝났다.}) 나왔을 때 사람들이 많이 얘기하고 그랬어요. 나는 공지영 그거 보면서 너무 열이 받기도 하고 그래서 울기도 했고. 최영미 시집 나왔을 때도 나 열받아서 울었어.

그런 거에 대해서 다 부정하는 건 아닌데, 뭐라 그럴까. 얼마 전에는 미경 언니가 우리가 한참 운동했던 80년대는 많은 사람들이 이미 돈으로 환산해서 가져갔대. 그렇잖아, 나보고 '글을 쓸려면 소재가 그렇다. 80년대는 다 약삭빠르게 돈으로 환산해서 가지고 갔다'라는 얘기를 했어. 내가 그 얘기 듣고 다음 다음날 아침에 아르바이트하러 일찍 나갔는데 갑자기 전철에서 내려 그 생각이 나는거야. 왜 그렇게 눈물이 쏟아지는지 몰라요. 그래 가지고 아침 10시쯤 아르바이트하는 아파트 주변에서 얼마나 내가 눈물이 많이 흘렸는지. 도저히 못 참아서 미경 언니한테 아침부터 전화했더니 지금 너무 눈물이 난다니까 ‘왜 그러냐고?’ 그래서 언니 말 한마디에 지금 이렇게 너무 눈물이 난다고 그랬지."


격렬한 사회운동의 물결은 어디서 일어나며 어떻게 순식간에 가라앉고 마는걸까. '그 시대'를 산 사람들은 왜 모두 더러는 박탈감을 더러는 부끄러움을 느끼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걸까.

어쨌거나... 끊임없이 삶과 죽음에 대해 묻는 이 사색적인 소설을 다 읽은 뒤 신비는 누운채로 두어시간 잠들지 못하고 상념에 잠겨야 했다. 분홍빛 아롱거리는 표지만큼이나 가슴속이 계속 울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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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바람이 2003/09/20 09:00 수정/지우기 REPLY

    젊은날의 성서...

    내 맘속엔 어떤 성서를 품게 될까 ㅠ.ㅠ

  2. 손대문 2003/09/21 09:00 수정/지우기 REPLY

    옛날에 저가 태어나지 않았던 시절이라 잘 모르겠군요.
    그당시에 제가 살았더라면...
    지금은 부정부패가 사라져서 다행이네요

  3. 가릉 2003/10/29 09:00 수정/지우기 REPLY

    이궁. 소설책이 아니었음 더 좋았을텐데. 하긴 그러믄 무척 재미없는 책이 됐겠구낭.. 맘속에 성서란 글귀가 무척 가슴을 애리게 하는군요. 27살에 아직 성서라 불린책을 만나지못함은 아마도 저의 게으름 때문일듯 합니다. ^^:

  4. 신비 2003/11/08 09:00 수정/지우기 REPLY

    성서라 불릴 책은 꼭 종이로 된 책만을 말하지는 않겠지요. 사람 속에서도 자연 속에서도 관계 속에서도 무수히 많은 책을 만나는 게 인생이지 싶습니다. (연륜도 없으면서 넘겨짚어봅니다. ^^;;)

  5. 가릉 2003/12/02 09:00 수정/지우기 REPLY

    그러게요.. 저 역시.. 그런. 걸 아적 접하지 못한 아쉬움을 적어 봅니다. 하긴 이미 접하구요.. 제가 무지해서 모를수도 있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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