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들에게 기대지 않고 정치하는 법: 도시생활자의 정치백서 :: 2010/05/10 11:21
/분류없음
우리 각시와 함께 쓴 '도시생활자의 정치백서'가 드디어 나왔습니다. 냉소하지 않고 희망을 품기 위해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제도와 기술들을 한 권에 담았지요. 소위 무림의 고수들만 아는 비법들을 평범한 시민들도 활용할 수 있도록 쉽게 풀이해 봤습니다... 조만간 출판기념회를 한번 열지요.^^ ---------------------- 나만 힘든 거라면 그럭저럭 참겠는데 우리 아이들의 삶도 행복하지 않다. 갓난쟁이들에게는 아토피가 끊이지 않고, 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에서는 안전사고가 심심찮게 터진다. 학원을 보내고 싶지 않아도 학교가 파하면 아이들 갈 곳이 마땅치 않고, 사실 집 밖만 나가면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겠다. 맘 같아선 쉬엄쉬엄 하라고 말하고 싶지만 경쟁이 갈수록 심해지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석유가 고갈되고 있다느니, 지구온난화가 심각하다느니, 불길한 말만 들리고, 왕따에, 사이코 패스에, 세상은 미처 돌아가는 것 같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 아이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집값이나 전세값만 좀 내려가도 살기가 훨씬 편할 텐데 지금까지 우리는 널뛰기하는 그 값을 치르느라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그 값이 정확한가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셈만 정확하게 해도 삶이 한층 행복해질 텐데 그런 행복을 뒤로 미룬 채 “내 탓이오”만 외쳐 왔다. 세상사는 게 원래 다 그렇지라며 담배를 꺼내 물거나 내 탓이라 자책하지 말고 정치에 관심을 좀 쏟자. 교육정책이 바뀌면 아이들의 삶도 달라질 수 있고 나도 더 이상 아이들에 얽매여 살지 않아도 된다. 노동관계법이나 보건의료관계법이 바뀌면 건강하게 삶의 여유를 누리며 살 수 있다. 주택법과 도시개발관련 법률을 바꾸면 2년마다 이사 걱정에 마음 졸이며 살지 않아도 된다.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두고 혼자서 먼 길을 돌아가니 지치고 힘이 든다. *차례 들어가는 글 I. 정치란 무엇일까? 1. 짜증나는 정치, 바꿀 수 없을까? 정치가 사라지면 살기가 편할까? 기업이 정치를 대신할 수 있을까?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2. 민주주의가 밥을 먹여준다 정치 참여가 양극화를 막는다 정치 참여가 우리의 자존심을 회복시킨다 II. 선거와 참여제도 활용하기 1. 선거를 제대로 치러볼까? 선거 때 누구를 찍어야 할까? 투표할 때 잊지 말아야 할 몇 가지들 직업으로서의 정치? 2. 선거 외에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은? 내가 뽑은 사람들을 감시하기 잘 못하는 정치인과 공무원 들을 괴롭히기 정신 못 차리는 정치인들 쫓아내기 내가 직접 조례를 만들기 우리 동네일은 우리가 결정한다 마을예산, 이렇게 쓸 수 없나? III. 정당 활용하기 1. 당원이 되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잠깐, 당신들 당비는 내고 당원 하나? 당원이 되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정당은 어떻게 당론을 결정할까? 지구당은 왜 폐지되었을까? 재미있는 정치는 불가능할까? 2. 정당을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공천과정을 바꿔보자 정당의 돈줄을 잡아라 선거제도부터 바꿔라 IV. 엔지오 활동하기 1. 엔지오란 무엇인가? 엔지오, 넌 누구냐? 엔지오와 시민단체는 뭐가 다를까? 2. 엔지오 고르기 환상의 짝꿍 엔지오 찾기 엔지오를 고르는 기준은? 3. 엔지오 활동하기 후원하기 자원활동하기 단체 만들기와 지원받기 4. 엔지오 활동, 세상을 바꿀 수 있나? 5. 생활 속의 엔지오, 생활하면서 대안을 만든다 먹으면서 바꾼다, 소비자생활협동조합 건강하게 바꾼다, 의료생활협동조합 불안을 넘어 협동한다, 다양한 협동조합들 V. 여론 만들기 1. 웹2.0과 현명한 군중 블로그는 소통이다 우리가 바로 미디어다 2. 허튼짓은 이제 그만, 정보공개제도가 있다 정보공개청구, 속살 파헤치기 도전! 정보공개청구 정보공개청구가 바꾼 제도 그리고 삶 VI. 직접 맞서기 1. 시민불복종하기 복종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생길까? 복종하지 않는다고 권력이 무서워할까? 2. 마을에서 동지를 모아볼까? 우리 동네 예산은 어떻게 쓰일까? 주민자치센터는 누가 운영할까? 도서관이나 복지관에서 생긴 일 학교운영위원회 참여하기 아마추어의 반란: ‘가난뱅이’들의 생존전략 부록: 권리 찾기 매뉴얼 1. 찾아보자, 내 권리 세계인권선언의 권리목록 경제·사회·문화적 권리 살피기 -노동권, 건강권, 주거권 2. 내 힘으로 바꾸는 세상 첫번째 고개-정보 얻기 두번째 고개-공공기관이나 정치인에게 요구하기 세번째 고개-정당과 엔지오를 활용하기 네번째 고개-공무원과 정치인에게 압력 가하기 다섯번째 고개-직접 나서기 Trackback Address :: http://episode.or.kr/anar/trackback/92
Tracked from amy 또는 신비의 별별 이야기들 | 2010/05/10 21:28 | DEL
월요일 아침, 급한 일들을 끝내고 슬슬 여유부리며 RSS의 최근 글을 보는데 한눈에 띈 몽똘의 글. "정치인들에게 기대지 않고 정치하는 법: 도시생활자의 정치백서" 어라 드디어 나왔구나? 하고 얼른 클릭해 들어가봤는데... 아니나다를까 그 한결같은 "각시 자랑"만 한웅큼 읽고 무척 어이없어했네요. ㅎㅎ 1등으로 책 사서 싸인 받아야지 했는데 오후무렵 편지 한 장과 함께 사무실로 택배가 날아왔더라구요. (빨간펜질은 제가 했어요. 효효) 몽똘, 혹은 하..
|
||
나는 순응주의자가 아닙니다. :: 2009/07/24 22:51
/분류없음
다른 삶을 꿈꾸며 이명원, 오창은씨랑 함께 공간을 만든지 벌써 2년이 지나갔네요. 그 2년의 세월 동안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토론을 하며 나눴던 고민들이 이 책에 담았습니다. 출판사의 책소개가 조금 거창해서 부담을 느끼고, 책 앞 오창은씨의 지행 소개가 조금 지나치다는 느낌을 받기도 하지만 돌이켜보면 우리가 그런 꿈을 꿨다는 생각도 들기도 하네요. 책의 제목은 2007년 겨울에 진행했던 청년특강의 제목 '아닙니다, 나는 순응주의자가 아닙니다'을 땄습니다. 원제는 너무 길어 책에 들어가기 힘들어서리...^^;; [녹색평론]의 김종철 선생님이 '강렬한' 추천사를써 주셨어요. 보통 추천사는 책의 내용이나 필자들에 관한 얘기를 하기 마련인데, 김종철 선생님은 이명박 정부와 한국의 현실에 대한 강한 비판을 추천사에 담아주셨네요. 정작 지행 얘기는 맨 마지막 문단 뿐이라는..ㅎㅎ 맨 마지막 에필로그는 제가 썼습니다. '지식협동조합을 제안한다'는 글인데, 아직 분명하게 구상이 잡히진 않았지만 여러 사람들과 함께 그것을 구체화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제안 형태의 글을 써봤습니다. 지행의 앞날도 지식협동조합이라는 것을 구체화시키는 형태로 잡힐 듯하네요. 어쨌거나 다소 두꺼운 책을 보니 마음이 뿌듯하고 그만큼 부담을 느끼기도 합니다. Trackback Address :: http://episode.or.kr/anar/trackback/91
|
||
시민행동 예비회원을 위한, 나를 보고 사회를 읽고 세상을 살피는 모임을 만들면 어떨까요? :: 2009/03/04 17:56
/분류없음
어제 잠시 시민행동 식구들이랑 채팅을 하고,
오늘 경제위기와 민의 대안이라는 토론회에 가서 잠시 비몽사몽 상태를 겪다, 불현듯 머리 속에 떠오른 생각입니다. 어쨌거나 현재나 미래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나온다고 봅니다. 교육이든, 주거이든, 사실 동일한 차원의 문제인 듯합니다. 그런 관계를 회복할 여러 방안들이 얘기되지만, 지금 필요한 중요한 부분은 청년들과 다른 세대가 소통하고 공감하는 부분이라고 믿습니다. 등록금부터 실업까지 온갖 고민을 지고 살아야 하는 이 부담스런 세대가 뭔가 희망을 품고 살아가려면 자기 자신에 대한 고민부터 자신이 살고 있는 한국사회에 대한 고민, 한국사회가 속한 이 지구촌의 운명에 대한 고민이 동시에 필요하다고 생각돼요. 결국은 이런 청년이 자라 시민사회의 구성원이 되고 시민단체의 회원들이 될 텐데요. 그냥 그런 친구들이 자라나주길 기다리지 말고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작년 치러진 총학생회 선거에서 비권/운동권 구분을 넘어 고민을 가진 학생회들이 여럿 구성되었다고 들었어요. 대학교 앞을 지나며 대자보나 플랭카드를 봐도 작년과는 사뭇 구호가 달라진 듯합니다. 이 세대의 삶과 고민을 나눌 장을 미리 마련하고, 이 친구들이 그렇게 맺어진 관계를 통해 대학을 나와 단체와 인연을 맺으면 어떨까요? 그냥 밍숭맹숭 얘기하긴 어려우니, 일종의 대화모임을 하는 거죠. 요즘 이런저런 대화모임에 많이 가는데, 그 사람이 그 사람이고 별로 새로운 얘기가 없어요. 누구를 내세우는 모임(물론 꼬실려면 여러 인물이 당근 포함되어야 하겠지만)이 아니라 자연스레 얘기를 나누는 모임을 만들면 어떨까요? 방식은 일정한 기획을 해서 각 대학 총학생회 쪽에 그 안을 쭉 뿌리면 좋을 듯한데요. 기획을 할 때 이번에 인턴을 했던 친구들을 포함해서리... 그리고 모임을 진행할 때 시민행동의 지금 회원들을 초청해 예비회원과 미래회원이 만날 자리도 마련하고... 모, 그런 생각이 듭니다. 물론 책임은 제가 못 집니다.ㅋㅋㅋ Trackback Address :: http://episode.or.kr/anar/trackback/89
Tracked from 함께하는 시민행동 2009 온라인 회원총회 | 2009/03/05 10:19 | DEL
기억하시나요? 2월 초부터 시민행동 회원, 웹멤버, 외부 관계자 등을 대상으로 시민행동 운영에 대한 여러가지 의견을 모으고 있습니다. 2009년부터 발표하게 되는 시민행동 [지속가능보고서]의 중요한 내용이 될 이해관계자 커뮤니케이션 과정이지요. 이번 총회에서는 회원 설문에 한해 그간 모인 약 70여명의 답변을 갈무리하여 모두 다섯가지 주제에 대한 회원 의견과 그에 대한 사무처장의 답변을 공개하려 합니다. 2009canSR__members.pdf 설문..
|
||
잠들지 못하는 남도 :: 2008/12/26 09:55
/분류없음
한국의 현대사에 여러 비극이 있었지만 제주도 4·3만한 비극은 없다. * 경인일보에 쓴 글입니다. Trackback Address :: http://episode.or.kr/anar/trackback/88
|
||
지행네트워크 창립 1주년 기념 심포지엄 및 후원의 밤 안내 :: 2008/08/31 19:28
/분류없음
지행네트워크 창립 1주년 기념 심포지엄 및 후원의 밤 안내 모시는 말씀 행동하는 지식을 꿈꾸는 사람들의 네트워크를 모토로 출범한 지행네트워크가 어느덧 창립 1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창립 1주년을 맞아 지난 1년 동안의 지행네트워크의 활동을 성찰하는 한편, 이후 지행의 활동전망을 모색하는 심포지엄과 후원의 밤이 열립니다. 대중들과의 만남 속에서 실천적 인문사회과학의 가치를 복원하고자 하고, 규격화된 지식이 아니라 현실과 교호하는 생성적 지식생산의 의지를 다시 확인해 보고자 합니다. 심포지엄이 끝난 후 지행과 함께 지난 1년여의 시간을 함께 했던 분들은 물론, 이후 지행의 활동과 연대에 우정을 함께 할 여러분들과 격의 없이 우정을 나누는 후원의 밤을 마련했습니다. 부디 함께 하시어 이 메마른 세속도시에서 지식을 매개로 한 '우정의 공동체'가 살아 움직이는 데 뜻과 힘을 보태주십시오. 쾌적한 가을밤 여러분들과의 친밀한 만남을 기대합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1부 지행네트워크 창립 1주년 기념 심포지엄 -일시 및 장소: 2008. 9. 5(금) 오후 4시 지행네트워크 세미나실 사회: 이강준(지행네트워크) 발표1 권경우(문화사회연구소): 대안적 지식인 운동의 현황/ 토론 김원(대안지식연구회) 발표2 오창은(지행네트워크): 지행네트워크 1년과 실천적 학술운동의 실험/ 토론 김정한(대안지식연구회) 발표3 이명원(지행네트워크) : 실천인문학으로서의 평화인문학의 전망/ 토론 하승우(지행네트워크) 집담회: 이강준, 김윤철, 이승원, 이영제 2부 후원의 밤 - 일시 및 장소: 2008. 9. 5(금) 오후 7시~12시 지행 맞은 편 지하 <광장호프> *기타 심포지엄 및 후원의 밤에 대한 문의는 지행홈페이지(jihaeng.net) 및 전화 (02) 823-4926을 참고해 주세요. *지행네트워크 후원계좌: 국민은행 054901-04-110934(예금주:오창은) 2008. 8. 30 지행네트워크 연구위원/활동가 일동 Trackback Address :: http://episode.or.kr/anar/trackback/87
|
||
군대가 없으면 나라가 망할까(뜨인돌) :: 2008/08/10 09:40
/분류없음
오랜만에 글을 올립니다.
개인적으로 힘든 일이 있어 통 글을 쓸 마음의 여유를 내지 못했지요. 또 한번 뼈저린 교훈을 받았지요. 새옹지마라는... 삶이란 게 그리 만만하지 않다는... ![]() 그 와중에 한 달 전 출판사로 넘긴 원고가 나왔네요. 제목이 좀 직설적이죠.ㅎㅎ 처음에는 너무 직설적이라 좀 망설였는데, 그냥 들이대는 물음도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에... 병역거부자의 얘기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담았으면 했는데, 원고를 넘기고 나니 병역거부자들의 책이 나오더군요. 여러모로 조금 아쉬움이 남는 책인데, 일단 물음을 던지는데 의미를 찾기로 했습니다. 서두는 마크 트웨인의 소설을 인용해서 시작됩니다. 『전쟁을 위한 기도』 한 나라가 전쟁을 결심하고 모든 국민이 애국심에 불타오르던 시대, 교회의 목사들조차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목놓아 외치던 은총이 가득한 시대에, 군대가 전선으로 떠나기 전 한 교회에서 주일예배가 시작되었다. 전선으로 떠나는 아들과 연인, 친지를 둔 사람들은 열렬히 기도를 드렸다. “늘 자애로우시고 관대하신 우리 모두의 아버지시여! 우리 귀한 병사들을 지켜주시고 이들이 조국을 위해 싸울 때 도우시고 위로하시고 용기를 주시며 이들에게 은총을 내리시고 전투의 날 위급한 순간에 방패로 막아주시고 전능하신 손으로 감싸주시고 힘과 자신감을 북돋아주시고 잔학한 습격에도 끄떡없게 하시며 이들이 적을 쳐서 무찌르도록 도우시어 이들과 이들의 깃발과 조국에 불멸의 명예와 영광을 주시옵소서.” 그 때 하느님의 사자를 자처하는 남루한 옷의 노인이 목사를 밀어내고 연단에 선다. 그러면서 그 노인은 사람들의 기도가 담은 또 다른 의미를 이렇게 해석해서 들려준다. “오 주여, 우리 아버지시여! 우리의 젊은 애국자들이 우리의 사랑하는 용사들이 전장으로 나가나이다. 이들과 함께 하소서! ……………… 우리를 도우시어 우리의 포탄으로 저들의 병사들을 갈기갈기 찢어 피 흘리게 하소서. 우리를 도우시어 저들의 청명한 벌판을 저들 애국자들의 창백한 주검으로 뒤덮게 하소서. 우리를 도우시어 천둥같은 총성을 저들의 부상병들이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내지르는 비명속에 잠기게 하소서. 우리를 도우시어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포화로 저들의 누추한 집들을 잿더미로 화하게 하소서. 우리를 도우시어 저들의 죄 없는 과부들이 비통에 빠져 가슴을 쥐어뜯게 하소서. 우리를 도우시어 저들이 집을 잃고 어린 자식들과 함께 흙바람 이는 황폐한 땅에 의지할 가지 없이 떠돌게 하소서. 누더기를 걸친 채 굶주림과 갈증 속에서 여름에는 이글거리는 태양에 겨울에는 살을 에는 한풍에 노리개가 되어. 영혼은 찢기고 노고에 지친 몸으로 헤매게 하소서. 주님께 안식할 무덤을 간구하더라도 부디 거절하시고 주님을 경모하는 우리를 위하여 저들의 소망을 산산이 날려버리시고 저들의 생명을 시들게 하시고 저들의 비참한 순례가 끝나지 않게 하시고 저들의 발걸음을 더욱 무겁게 하시고 저들의 눈물로 저들의 길을 젖게 하시고 저들의 상처투성이 발에서 흐르는 피로 흰 눈을 얼룩지게 하소서. 우리는 그것을 바라나이다. 사랑의 정신으로 사랑의 근원이신 주님께.” 이 기도는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라는 모험소설로 유명한 작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이 발표했던 『전쟁을 위한 기도』라는 소설에 실려 있다. 트웨인은 이 글에서 어느 한 나라의 승리가 다른 나라의 패배를 뜻하고, 승리의 기쁨이 패배의 고통과 슬픔이라는 다른 면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전쟁의 양면성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다른 나라의 아버지나 아들의 목숨을 빼앗고 그들이 살아온 터전을 파괴해서 가족이 고통에 몸부림치게 만들어야 우리는 전쟁에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나와 다른 편에 서 있다는 이유만으로 타인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는 전쟁을 막지는 못할 지언정 그것을 찬양하는 게 올바른 일일까? 특히 트웨인은 사랑과 평화를 전파해야 할 종교인들조차 증오를 설교하고 전쟁을 찬양하는 현실이 얼마나 모순되고 비극적인지를 이 글에서 꼬집었다. 사랑과 평화의 근원인 하나님에게 전쟁의 승리를 구하는 기도야말로 얼마나 왜곡된 것인가. 전쟁은 싸움에 진 나라를 완전히 파괴해서 두고두고 큰 고통을 준다. 죄 없는 아이들이 밥을 굶고 더위와 추위에 몸을 떨어야 하고, 부모들은 그런 아이들을 지켜보며 더 큰 고통에 시달려야 한다. 그리고 모두가 똑같이 고통을 나누지도 않는다. 언제나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이 전쟁에서 더 많은 고통을 겪는다. 전쟁이 가져올 승리의 이득에 눈이 팔려 모두가 그 비극에 눈을 감던 시대에도, 작가의 양심으로 전 세계의 고통을 자신의 것이라 느끼던 트웨인은 그 모순에 눈을 감을 수 없었다. 그래서 트웨인은 글을 쓰는 것 외에도 <뉴욕반제국주의동맹>의 부의장으로 일하며 직접 부조리한 현실에 맞서기도 했다. 1906년 미군이 필리핀 남부의 한 마을을 습격해 남녀, 아이를 가리지 않고 6백 여 명의 주민을 학살하는 ‘모로 대학살’을 저질렀다. 트웨인은 미국의 식민지를 넓히려는 이 더러운 침략전쟁을 강력하게 비난했다. 트웨인은 온갖 명분으로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려는 미국 정부에 맞서 전쟁의 실상을 드러냈다. “우리는 수천 명의 섬사람들을 진압하고, 그들을 매장하고, 그들의 땅을 파괴하고, 그들의 촌락을 불태우고, 그들의 미망인과 고아들을 길거리로 내몰았으며, 비위에 거슬리는 수십 명의 애국자들에게는 유랑의 비통함을 안겼고 나머지 천 만 명은 우호적인 동화 정책으로 굴복시켰다”(하워드 진, 2003) 어떤 이는 전쟁이 나쁘다 해도 적국이 침략한다면 어쩔 수 없이 맞서 싸워야 하지 않느냐고 물을지 모르겠다. 침략전쟁이 아니라 정의로운 전쟁,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전쟁이라면 어쩔 수 없이 무기를 들어야 하지 않을까?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는 얘기도 있지 않은가. 예를 들어, 미국이 9․11 테러를 당한 뒤에 부시 대통령이 ‘악의 축’과의 전쟁을 선언하고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했듯이, 악을 제거하고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전쟁은 정당화될 수 있지 않을까?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전쟁이 아니라 내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리고 나쁜 폭군을 몰아내기 위해서라면 전쟁이 정당화될 수 있지 않을까? Trackback Address :: http://episode.or.kr/anar/trackback/86
|
||
우직한 바보, 국가를 거스르다 :: 2008/07/28 10:40
/분류없음
![]() 근래에 읽은 책들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글이었습니다. 우직한 바보, 국가를 거스르다
하승우(지행네트워크 연구활동가) 내가 톨스토이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 글은 ‘바보 이반’이라는 소설이었다. 아이들의 눈높이로 보면 그 글은 참으로 유쾌하고 명쾌했다. 권력과 돈에 대한 욕심을 이기지 못하고 악마들의 꼬임에 넘어가 결국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두 형과, 우직하게 욕심 없는 삶을 살아 악마들조차 항복하게 만든 이반의 얘기는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지를 알려주었다. 먹을 것과 살림살이를 스스로 장만하는, 손바닥에 굳은 살이 박힌 사람들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임을, 그리고 그런 우직한 바보들이 모인 나라야말로 어느 누구도 정복할 수 없는 건강한 나라임을 ‘바보 이반’은 알려주었다. 톨스토이는 권력이나 돈을 좇지 않고 타인과 함께 나누며 욕심을 부리지 않고 살아야 모두가 즐거울 수 있다는 간단하고 분명한 진리를 알려주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시대에는 ‘잘난 사람들’과 ‘똑똑한 사람’들이 세상을 지배한다. 이들은 풀뿌리 민중이 자신들을 믿고 따르면 풍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장담한다. 그래서 어리석은 두 형의 나라에서처럼 전쟁이 끊이지 않고 민중의 살림살이는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잘나고 똑똑한 이들이 지배하는 어리석은 나라의 국민들은 파이를 더 키워야 나눌 수 있다는 속임수에 빠져 하나라도 더 가지려 바둥거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근본적인 불안감과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 무한경쟁의 승자는 누구일까? 불안감과 공포의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이제 우리는 톨스토이처럼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고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그리고 지금 우리 곁에 욕망을 부추기는 악마가 없는지 돌아봐야 한다.
톨스토이는 왜 국가에 반대했는가?
톨스토이는 사람들의 일그러진 욕망을 부추기고 세계를 파멸로 밀어 넣는 악마가 바로 ‘국가’라고 봤다. 귀족으로 태어나 국가의 혜택을 받으며 자랐고 장교로 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던 톨스토이가 왜 국가를 ‘악의 축’으로 지목했을까? 그의 생활조건이 국가권력과 멀지 않았기 때문에 톨스토이는 국가의 사악한 면을 분명하게 볼 수 있었을지 모른다.
톨스토이는 풀뿌리 민중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존재가 바로 국가라고 주장했다. 톨스토이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어떤 사람이 필요에 따라 스스로 생산한 물건은 관습이나 여론, 정의심과 상호합의에 의해 보호된다. 폭력으로 보호할 필요가 전혀 없다. 수만 에이커의 삼림지를 한 명의 지주가 소유하고 있고, 근처에 사는 수천 명의 사람에게 땔감이 없다면, 삼림지를 보호하는 데는 폭력이 필요하다.”(「우리 시대의 노예제」) 만일 서로가 각자 필요한 만큼만 누리고 산다면 굳이 폭력을 사용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한 사람이 너무 많은 욕심을 부리기 때문에 폭력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 때 국가는 약자의 편이 아니라 강자의 편에 선다.
국가가 자연의 도리를 어기는 부조리한 착취를 정당화하고 다수를 억압하기 위해 공권력을 행사한다. 심지어 국가는 그런 부조리함에 저항하는 민중에게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폭행하고 심지어 목숨을 빼앗기도 한다. 더구나 국가는 그런 잘못을 미화하고 은폐하려 들기 때문에 더욱더 나쁜 존재이다.
이런 국가의 폭력성과 은폐는 경찰과 군대로 증명된다. 톨스토이는 군대야말로 국가의 사악한 면을 가장 잘 보여준다고 봤다. 톨스토이는 “모든 정부와 통치 계급은 기존의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군대를 필요로 한다”(「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라며 군대가 외부의 침략을 막기 위한 조직이라는 주장을 반박했다. 톨스토이는 “세금을 성공적으로 거두어들이기 위해 정부는 상비군을 유지한다”(「애국심과 정부」)며 국가가 자기 나라의 국민을 착취하기 위해 군대를 유지한다고 밝혔다. 톨스토이는 국가가 널리 퍼뜨리는 테러리즘과 세금강탈, 정신적인 세뇌가 사람들을 병사로 만들고 군대를 꾸린다고 비판했다.
국가는 폭력성을 비판받을 때면 언제나 외부의 적을 핑계로 대며 애국심을 자극한다. 하지만 톨스토이는 그런 계략에 넘어가지 않고 애국심이란 국가가 만들어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국가는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부를 거두어갔고, 징집병으로 이루어진 군대를 훈련시켰을 뿐 아니라, 대중에게 정신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손아귀에 넣었다. 언론, 종교집단, 무엇보다 교육이 그런 수단들이다.”(「사회 개혁가에게 고함」) 애국심이란 국가가 만들어낸 비합리적이고 해로운 감정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국가의 사악한 면을 깨달았다고 해서 귀족이 자신의 특권을 포기하고 국가를 거부하기란 쉽지 않다. 톨스토이가 국가에 맞서리라 마음을 먹은 것은 러시아 민중의 순박함과 평화에 대한 사랑을 깨닫고 그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만일 러시아 민중이 귀족들처럼 교육을 받을 수 있다면, 그들이 조그만 땅을 나눠 경작할 수 있다면 평화가 찾아오리라고 그는 믿었다.
물론 완전한 평화라는 유토피아가 금방 찾아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톨스토이는 무질서의 혼란보다 국가의 지배를 받는 질서가 더 위험하고 나쁘다고 봤다. “정부의 부재가 정말로 부정적인 의미에서 무정부 상태를, 이 단어가 내포하는 무질서한 측면을 뜻한다고 하더라도―사실은 결코 그렇지 않지만― 무정부적 혼란은 정부가 사람들에게 야기한 오늘날의 상황보다 나쁠 수 없다”(「애국심과 정부」)라는 말에서 우리는 톨스토이의 생각을 분명하게 읽을 수 있다. 이성적인 존재로 태어나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국가의 강제력 없이도 서로 자율적으로 토론하고 합의하며 사회를 유지할 수 있다. 그래서 톨스토이는 시대를 훨씬 앞서 병역거부와 납세거부를 주장하기도 했다.
단순히 글에서 아나키스트들의 이론을 얘기하거나 그런 사람들과 사귀었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사람을 아나키스트라 부를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책의 곳곳에서 드러나듯이 톨스토이의 생각은 아나키스트들의 생각과 대부분 일치한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톨스토이를 종교인이나 작가로 묘사할 뿐 아나키스트로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톨스토이는 왜 아나키스트와 사회주의를 비판했는가?
톨스토이는 자신을 아나키스트라 칭하지 않지만 아나키즘에 동의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혔다. 그는 “아나키스트들은 모든 점에서 옳다”(「아나키즘에 관하여」)라고 분명하게 선언했기 때문이다. 다만 톨스토이는 그 시대의 아나키스트들이 폭력을 즐겨 사용했기 때문에 자신을 아나키스트라 선언하는 것을 보류했을 뿐이다.
흔히 얘기되듯이 아나키즘의 특징을 테러와 폭력에서 찾는다면, 톨스토이는 결코 아나키스트라 불릴 수 없다. 톨스토이가 국가를 비판했던 여러 이유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폭력이기 때문이다. 설령 국가를 무너뜨리기 위한 방법이라 하더라도 폭력은 용납될 수 없었다. 평화적인 목적이 폭력적인 방법으로 실현될 수는 없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톨스토이에게는 특별히 세속의 이념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어떤 이념을 믿어야만 신념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신념은 가장 기본적인 윤리, 즉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라는 원리를 지키는 것이다. 과학적인 이론의 증명보다는 가장 기본적인 윤리를 지키며 사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톨스토이는 그 시대의 사회주의를 인정할 수도 없었다. 톨스토이는 사회주의의 이상이 좌절될 수밖에 없다고 봤다. 그 시대의 유명한 아나키스트였던 프루동이나 크로포트킨처럼 톨스토이도 국가를 대신할 대안을 노동자보다 농민에서, 도시보다 농촌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도시 노동자들의 비참한 상황을 개선하는 방법이 농촌을 바로세우는 데 있다고 봤다. “경제학은, 농민들을 시골에서 몰아내는 원인에 주의를 기울이지도 않고 어떻게 이런 원인을 제거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심을 쏟지도 않으며 오로지 기존의 공장과 작업장에서 노동자의 조건을 개선하는 데만 골몰하고 있다.”(「우리 시대의 노예제」)
사실 톨스토이는 도시의 산업이 농업보다 중요하거나 진보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연의 이치를 따르며 자율적으로 일하고 스스로 필요한 것을 채우는 농민의 자급과 자치가 단조롭고 중앙의 통제를 따르는 노동자의 계획경제보다 좋은 삶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공장 일이 언제나 유해하고 단조로운 반면 농업은 건강하고 다양성을 제공하는 일이다. 농업은 자유롭고 농민들은 자기 마음대로 일하거나 쉴 수 있는 반면 공장 일은 공장이 노동자들의 소유라고 하더라도 언제나 기계 작동에 따라 일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공장 일은 부차적인 반면 농사일은 일차적이다. 농업이 없으면, 공장은 존재할 수 없다.”(「우리 시대의 노예제」)
따라서 톨스토이는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하던 것과 다른 혁명의 목적을 분명하게 밝혔다. “그들이 깨달아야 하는 사실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혁명의 목적이 보통 선거권과 개선된 사회주의적 제도를 갖춘 새로운 억압적 정치체제의 건설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 혁명의 목적은 전 국민, 특히 국민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는 1억 명의 농민들을 온갖 종류의 억압에서 해방시키는데 있다.…이미 그들에게 어울리며 그들의 사회적 요구를 충족시켜주는 그런 형태의 사회생활이 이미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든 일원의 평등과 협동노동 체계, 토지공동소유에 바탕한 공동체 조직이다.”(「세상의 끝」)
농민과 소규모 농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생각은 톨스토이가 프루동에게 이어받았고 간디에게 이어준 이상이고, 산업화의 욕망을 벗어난 진보의 이상이다. 톨스토이는 러시아의 소농, 전 세계의 소농들이야말로 인류의 미래를 열 주체라고 봤다.
지금 우리의 눈으로 보면 톨스토이의 이런 주장은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산업자본이나 금융자본의 힘을 깨닫지 못한 순진한 주장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자급하지 못하는 공동체는 외부의 힘에 휘둘릴 수밖에 없기에, 세계화의 시대에도 농민과 농촌은 여전히 중요한 존재이다. 더구나 농업의 노동은 사람이 서로 협력하며 자연스럽게 상호부조의 정신을 기르도록 하기 때문에 무한경쟁의 폭력성을 해결할 수 있는 좋은 해결책이다. 어쩌면 시대착오적으로 보이는 톨스토이의 주장이야말로 우리 시대에 가장 절실하고 근본적인 처방일 수 있다.
그렇다면 톨스토이는 이런 자신의 이상을 어떻게 실현하려 했을까? 아나키스트들의 폭력적인 방식이나 사회주의자들의 새로운 국가건설 외에 어떤 실천이 가능할까?
좋은 삶은 가능한가?
폭력은 그 사회의 건강성을 측정하는 기준이다. 폭력의 발생은 그 사회가 건강하지 않다는 점을 뜻하고, 그런 폭력의 원인을 제거할 때 그 사회의 건강은 회복된다. 따라서 폭력의 발생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고, 다만 그런 폭력에 대한 처방이 폭력을 반복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비폭력의 처방은 깊이 뿌리내린 폭력의 원인을 분명하게 제거할 수 있을 만큼 근본적이어야 한다.
톨스토이는 국가에 대한 폭력적인 저항이나 선거를 통한 집권이라는 그 시대의 혁명론이 그런 근본적인 처방이 아니라고 봤다. 그러면서 톨스토이는 폭력을 사용하지도, 정부조직에 참여하지도 말자고 주장했다. “정부 폭력을 없애버리는 길은 단 한가지다. 사람들이 거기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다.”(「우리 시대의 노예제」) 정부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공직을 맡지 않을 뿐 아니라 정부를 도울 세금도 내지 말아야 한다는 점도 포함했다. 그 누구도 협력하지 않는다면 국가는 자신이 뜻하는 바를 마음대로 이룰 수 없다.
그리고 톨스토이는 우리 자신의 욕망을 바꿔 소유의 욕망에서 벗어나 나누며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욕망의 변화는 국가의 힘을 약화시킬 뿐 아니라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동력이다. 어떻게 그런 변화가 가능한가? 그것은 “사람들에게 진정한 행복을 계시하고, 부가 축복이 아니며 오히려 진정한 행복을 눈앞에서 감추고 시선을 빼앗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한 가지 방법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속세의 욕망의 구멍을 막는 것이다. 그래야만 집안 골고루 열을 보낼 수 있을 테다. 이 방법은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생산의 증가, 따라서 일반적인 부의 증가를 위해 노력하는 것―과는 정확히 반대된다.”(「사회주의 국가, 기독교도에 관하여」)
톨스토이는 이런 의식과 태도의 변화야 말로 “단 하나의 영구적인 혁명”, “도덕적인 혁명, ‘속사람’의 재생”(「아나키즘에 관하여」)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국가라 불리는 인위적인 연합체를 위해 삶과 자유를 희생하는 게 아니라 진정한 삶과 자유를 위해 국가라는 미신으로부터 그리고 그 고산―범죄라고 할 만한, 인간에 대한 복종―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국가와 권력기관에 대한 태도가 변화하면 한 세상이 끝나고 다른 세상이 시작될 것이다.”(「세상의 끝」)
이런 도덕적인 혁명이 자연스레 이루어질 수도 있지만 때로는 의도적인 개입도 필요하다.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교육이다. 자유로운 교육이 확대되어 민중이 자신의 존재와 중요성에 눈을 뜨고 자신감을 회복하면 국가의 중요성은 줄어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실 톨스토이의 주장은 그가 믿던 기독교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종교적인 믿음을 강조하는 것이 반드시 특정 교파의 이론을 따르는 것은 아니다. 모든 종교의 가르침은 근본적인 윤리에서 동일하고, 그것은 교육의 이성적인 힘을 보완하는 정서의 힘을 만들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동일한 이해를 통해 모든 사람을 결집시키는 이 같은 종교적 개념은 권력에 대한 복종이나 권력참여 행위와 양립할 수 없으며, 진정으로 권력을 소멸시킬 수 있는 무기”이자 “자기 자신과 사람들 사이에 더 굳건하고 훌륭한 사랑의 관계를 확립하는 것”이고 “스스로 훌륭한 삶을 사는 것”(「사회 개혁가에게 고함」)이다.
톨스토이의 이런 가르침에 우리는 뭐라고 답을 해야 할까? 우리는 당신과 다른 시대를 살고 있다고, 그래서 그런 가르침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얘기해야 할까? 그건 아니다. 오히려 바보처럼 사는 게 불가능하다고 영악하게 얘기하지 말고 내가 바로 바보라고 당당히 선언하며 다른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왜냐하면 바보처럼 살았던 이반이 있었기에 모든 걸 잃어버린 두 형도 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나 사회구조를 핑계 삼아 알리바이를 마련하지 말고 지금 당장 내 삶부터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 그것이 결국엔 이 사회를 구하고 다른 생명을 구하는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리 호이나키는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에서 이 시대를 살아있게 하는 사람들을 ‘거룩한 바보’라고 부르며 “‘거룩한 바보’들이 아직 우리들 사이에 존재하고, 그들의 연기 때문에 우리가 세계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은 지금 우리 모두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고 얘기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바보 이반의 소박한 진리를 따를 때 우리는 전쟁과 물신의 시대를 넘어 공생공락(共生共樂)의 시대를 누릴 것이다. Trackback Address :: http://episode.or.kr/anar/trackback/85
|
||
휴식, 일상을 변화시키는 힘 :: 2008/07/18 11:13
/분류없음
격월간 잡지 <민들레>에 쓴 글입니다.
시민행동 식구들은 휴가 때 뭘 하며 보내시나요? ------------------- 휴식, 일상을 변화시키는 힘 하승우(지행네트워크 연구활동가) 프랑스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한 선생님에게 이런 얘기를 전해 들었다. 바쁜 유학생활을 하던 어느 날 프랑스 정부가 보낸 편지 한 통을 받았는데, 그 편지에는 이런 얘기가 적혀 있었다. 모든 아이들은 바캉스를 즐길 권리를 가지고 있으니 아이를 데리고 바캉스를 떠나라, 정부가 필요한 비용을 지원해 주겠다. 자기 나라의 국민도 아닌데 아이들의 바캉스까지 챙겨주는 세심함이라니, 한국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영화 <식코>를 보며 아기를 돌보는 사람까지 지원하는 프랑스 정부에 놀라기도 한 터라 얘기를 들으며 마음 한 편에 살짝 부러움이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니 그런 삶이 행복할까라는 의문도 들었다. 물론 바캉스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삶이 부럽긴 하지만 왜 국가가 나서서 국민들의 휴가까지 일일이 챙기며 걱정할까? 생활공간을 떠나 휴양지로 가야만 쉴 수 있다면, 그리고 그런 이동에 필요한 비용을 지불해야만 쉼을 즐길 수 있다면 그 쉼의 의미는 무엇일까? 넉넉한 시간에서 남은 시간으로 우리에게 여가와 휴식은 어떤 의미일까? 보통 여가와 휴식은 일상의 삶과 분리된 시간 또는 일상에서 벗어난 공간이라 얘기된다. 주말과 빨간 날은 한 주의 피로함을 푸는 시간이고, 휴가는 반드시 집을 떠나 즐겨야 하는 일탈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지치고 힘든 일상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주말과 휴가는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 빨간 날과 휴가 기간에 쉬어야 한다는 규칙은 누가 정한 걸까? 인류가 처음 문명을 일궜을 때부터 그런 날들은 정해져 있었을까? 영국의 사회학자 테오도르 젤딘(T. Zeldin)이 쓴 『인간의 내밀한 역사』(강, 1999)에 따르면, ‘주말(weekend)’이라는 말은 영국의 자본가들이 만든 말이다. 18세기까지 영국 사람들은 요일을 가리지 않고 놀았고, 일요일을 넘어 월요일, 화요일까지 놀았으며 심지어 수요일에도 놀았다. 사람들은 토, 일요일날 마신 술을 깨기 위해 쉬기도 했고, 닭싸움이나 권투, 축구를 즐기기도 했으며, 자신이나 가족들에게 필요한 것을 장만하기도 했다. 당시의 노동자들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장만하기 위해서만 일했다. 일하는 시간과 노는 시간을 스스로 정했고, 그러다보니 그들의 일상에서는 일과 휴식이 섞여 있었다. 그들은 여가를 위해 일하지 않고 자신의 필요에 따라 일했다. 그러자 자본가들은 이런 규칙적이지 않은 오래된 노동습관을 바로잡기 위해 토요 휴일(Saturday holiday)을 만들었다. 공장주들은 원래 휴일로 보장되었던 성 월요일(Saint Monday)을 없애고 월요일에 온종일 일하는 대가로 토요일 오후 일을 3시간 줄여주었다. 그리고 임금도 얼마나 생산했는가가 아니라 몇 시간 일했는가에 따라 지급했다. 작업시간과 휴식시간이 철저하게 구분되었고, 한 시간에 몇 개를 생산해야 한다는 시간에 따른 작업규정들이 정해졌다. 일하는 시간에 딴 일을 하거나 자리를 비우면 가차 없이 해고되었다. 기계의 속도에 맞추다보니 일은 힘들어지고 그러다보니 일하지 않는 시간에는 다른 일을 못하고 반드시 쉬어야 했다. 이 규칙을 따르지 않으면 일자리를 주지 않겠다고 위협하자 노동자들은 어쩔 수 없이 규칙을 받아들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주말은 19세기 말에 ‘탄생’했다. 당시 영국이 가장 부유하고 강한 국가였기 때문에 다른 나라들도 ‘영국식 주(week)’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젤딘은 이 주말이 이전의 공휴일이던 안식일(sabbath)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원래 여가는 자유로이 즐기는 ‘넉넉한 시간’이었는데, 이제는 일하고 ‘남은 시간’이 되었다. 서양의 시간개념을 그대로 따랐던 한국의 상황은 더욱더 심각했다. 원래 한국에서는 인공적인 시계시간이 아니라 자연의 시간을 따랐고 사람들은 그 시간에 맞춰 하루 일과를 보냈다. 동화작가 故권정생 선생은 “기계문명이 발달하지 못했던 지난날 우리 조상들은 온몸의 감각을 동원해서 하루하루를 살았다. 그래서 달력이 없어도 날짜는 정확히 알고 시계가 없어도 시간을 알았다. 꼭두새벽부터 어둑새벽, 찬새벽, 밝을녘 등등으로 아침시간을 나누었다. 저녁나절부터는 해거름, 해넘이, 어스럼저녁, 이렇게 숫자표시보다 훨씬 따뜻하고 시적인 시간개념으로 사물을 표현했다.”(『우리들의 하느님』, 녹색평론사)며 그 시간의 아름다움을 얘기한다. 하지만 시계시간에 길들여지면서 우리는 이런 시적인 시간을 잃어버렸을 뿐 아니라 그 시간을 누리던 몸의 즐거움도 잊어버렸다. 소위 ‘개화’와 함께 서구적인 시간개념이 침투했고, 개화파들은 태양력을 채택하고 단발령을 내렸다. 기계적인 시간감각과 낯선 외모, 그것이 우리의 개화였다. 그 후 식민지권력과 독재정권은 사람들의 시간을 통제하려 들었고 노동자들을 산업역군으로, 온 나라를 군대로 길들였다. 전 국민이 아침에는 국기게양식과 국민체조를, 저녁에는 국기하강식을 따르며 국가의 시간을 몸에 익혔다. 여가나 휴가는 사치였고, 빨간 날에 쉬기만 해도 다행이었다. 이런 사회에서 스스로 시간을 정하는 건 불가능했다. 어른들의 시간만 그렇게 관리된 건 아니다. 학교의 시간도 마찬가지다. 도대체 방학(放學)이란 무엇인가? 책을 잠시 덥고 평상시엔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는 게 방학이라면서, 방학 때마다 생활계획표나 일과표를 학교에 제출하라고 한다. 책상과 학교를 벗어나는 게 방학이라면서 방학숙제를 하라고 한다. 이 무슨 해괴한 짓인가? 모순되지만 서양에서 학교를 뜻하는 스쿨(school), 슐레(Schule), 에콜(ecole)이라는 말은 여가를 뜻하는 그리스어 스콜(skhole)에서 생겼다. 그 뜻에 따르면 학교는 선생님의 말과 생각을 앵무새처럼 따르는 학습의 공간이 아니라 자유로운 사색의 공간이다. 학생들의 다양한 개성과 재능은 자유로움 속에서만 싹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교는 가정이나 국가, 그 어떤 구속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학생들에게 보장하는 공간이었다. 따로 방학을 두는 게 아니라 학교 자체가 바로 자유로움이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학교는 어떠한가? 아이들이 자유로이 사색할 수 있는 시간은 주어지는가? 두 손 가득 바람을 느끼고 풀과 꽃의 생명력을 느끼며 땅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시간이 존재하는가? 친구와 술래잡기하고 깔깔거리며 뛰어놀 수 있는 시간은 존재하는가? 혼자 누워 팔베개를 하고 하늘을 바라보며 무한한 공상에 잠길 시간은 존재하는가? 이런 자유로운 시간을 박탈한 채, 형식적으로 주어지는 자유의 시간이 바로 방학이다. 이처럼 우리의 시간은 언제나 나눠져 있다. 어른들은 여가와 노동을 구분하는 이분법에서, 학생들은 학교와 방학을 구분하는 이분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나눠져 있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그런 나눔의 기준과 권한을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래서 언제나 우리는 바쁜 일상을 쪼개어 ‘남는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내가 하고픈 일은 해야 할 일에 밀려나고, 휴가나 방학이라는 이름으로 잠깐 동안 벗어날 그 순간의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일상탈출, 여행쇼? 한국에도 주5일 근무제가 실시되면서 주말의 텔레비전 프로그램들은 맛있는 먹거리와 좋은 여행지에 관한 얘기들로 온통 채워지기 시작했다. 이런 프로그램들은 정보제공과 광고를 뒤섞어 사람들의 소비욕망을 자극한다. 어느 방송사의 프로그램은 ‘여행쇼’라는 코너를 마련하기도 했는데, 그 말이 지금의 현실을 나타내는 적절한 표현일지 모르겠다. 우리에게 여행과 휴식, 여가는 이미 ‘쇼’가 되었으니까. 자본주의 사회는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쥐어짜기 위해 휴일을 줄였을 뿐 아니라 여가생활을 온건하고 생산적인 방향으로 전환시키려 했다. 그 일환으로 ‘금주운동’과 ‘동물애호운동’ 등을 벌이고 일상 자체를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관리하려 들었다. 초기 자본주의 정신이 근검절약을 강조했다면, 현대의 소비자본주의는 ‘합리적인 소비’를 강조하며 돈을 합리적으로 써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때부터 소위 ‘건전하게 노는 법’이 유행했다. 이런 법은 직업학교나 땐스홀, 바캉스처럼 노동에 도움을 주거나 육체의 스트레스를 풀어줘서 사람들이 재충전을 하고 다시 일터로 돌아와야 한다고 권했다. 이웃들과 함께 나누는 여가생활은 줄이고 조용히 방콕해서 추리소설에 탐닉하거나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것을 권했다. 건전하고 좋은 여가생활의 기준은 다시 일을 하는데 무리를 주지 않는 것이었다. 사회학자들에 따르면 19세기 후반부터 이런 여가활동이 체계적으로 권장되었다고 한다. 더불어 ‘친절한’ 자본주의 사회는 여가를 하나의 산업으로 만들었다. 이런 산업을 인포테인먼트라며 찬양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실제로는 사람들의 즐거움을 획일화시키고 소비의 욕망을 자극할 뿐이다. 그런 즐거움은 모든 살아 있는 생명과 자연에 가치를 매기고 소비의 대가를 요구한다. 여가의 주체가 향유의 대상과 맺는 관계는 사라지고 오직 화폐가치만이 대상에 부여된다(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는 카드 회사의 광고는 그런 로망을 직설적으로 표현했다. 자본주의 사회의 논리는 이런 거다. “즐겁게 놀되, 가급적 이렇게 소비하며 놀면 좋다. 그리고 갔다 와서 열심히 일하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놀고 싶으면 더욱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 이 논리에서 벗어난 즐거움이나 여가, 휴식은 인정되지 않는다. 학교도 마찬가지다. 학교에서 여가활동은 공부를 방해하지 않는다는 조건에서만 가능하다. 심지어 방학 때의 시간도 자유로움이 아니라 언제나 ‘학습’과 연관된다. 체험학습, 과학탐구, 문화체험활동 등 방학의 시간은 학교로 돌아간 뒤에 도움을 줄 내용을 배우는 또 다른 수업시간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이런 흐름에 발맞춰 방학 프로그램을 만들어 공급하는 기업들도 생겼다. 결국 우리 사회에서 여가와 휴식은 빡센 노동을 정당화하는 알리바이일 뿐이다. 휴식이란 잠시 동안 일상을 떠나 피로한 육체를 쉬고 노동을 위해 재충전하는 시기일 뿐이다. 떠나올 때는 즐거우나 돌아갈 날이 다가올수록 부담스러운 바캉스, 다른 삶의 길은 없을까? 노나 공부하나 마찬가지다 미국의 사상가 마르쿠제(H. Marcuse)는 『일차원적 인간』에서 이런 질문을 던졌다. 노동자와 그의 사장이 똑같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즐기고 같은 휴양지를 찾는다면, 그 사회는 좋아진 걸까? 어쩌면 그런 동일화는 좋아졌다는 착각만 주는지 모른다. 그 점은 주5일 근무로 더 많은 여가를 얻은 듯 하지만 오히려 삶은 더 팍팍해진 것과 무관하지 않다. 최면같은 광고와 광고처럼 보이지 않는 상품정보들은 사람들이 노동규율에 복종하고 상품을 소비하면서 행복함을 느끼게 한다. 그런 상황에서는 참된 욕구라고 생각하는 것조차 그렇게 조작되어 착각하는 것일 수 있다. 마르쿠제는 풍요로움과 자유로 치장한 지배가 사회의 모든 영역으로 침투해 들어가 저항을 억누르고 대안을 흡수하는 사회, 그곳이 바로 일차원적 사회라고 얘기했다. 예전에 “노나 공부하나 마찬가지다”라는 노래를 즐겨 불렀다. 요즘도 그 생각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놀면서 배운 것이 공부하며 얻은 것보다 작지 않고 때론 그 의미도 깊다. 즐겁게 놀면서 다양한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무조건 열심히 공부하고 일해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을 것만 강요하는 한국사회에서는 더욱더 그런 노는 경험이 중요하다. 놀아봐야 왜 놀고, 어떻게 놀아야 하는지를 스스로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런 생각은 경계를 넘어서야 한다. 이제는 일상적인 삶과 벗어난 장이 아니라 일상 속에 쉼과 휴식을 가져올 방법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축제를 누려야 한다. 노동과 여가, 일상과 축제가 서로 대립한다는 생각은 오랜 인류의 지혜가 아니라 불과 2세기 전에 ‘만들어진 상식’이다. 오히려 인류의 지혜는 여가 속의 노동이, 축제 속의 일상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 글에서 어떻게 놀아야 좋다고 얘기하는 건 어리석다. 왜냐하면 그것은 각자가 찾아야 할 몫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준을 제시할 수는 있을 듯하다. 여가는 남는 시간이나 쉬는 시간이 아니라 우리 삶을 넉넉하게 할 시간이다. 스스로 각자가 시간을 관리할 권한을 회복하고 상품으로 소비되는데 저항하려는 욕망을 구성해야 한다. 시계시간에 저항하지 않고서 여가를 되찾겠다는 생각은 착각일 뿐이다. 최근에 아주 바람직한 예를 우연히 봤다. 서울광장에 모인 촛불소녀가 치켜든 “이제 우리 방학이다”라는 구호였다. 여가는 쉬는 시간이 아니라 뭔가를 불태우는 시간이다. 일상에서 벗어나 한가로움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꽉 짜인 일상 자체를 변화시키는 시간, 그것이 진정 여유로움과 휴식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Trackback Address :: http://episode.or.kr/anar/trackback/84
|
||
지행네트워크 정기 콜로키움: 시민운동의 상상력, 이분법을 넘어서 :: 2008/07/01 15:20
/분류없음
안녕하세요.
“좋은 삶을 말하다 - 생태 / 자치 / 예술2”
행복한 삶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올바르면서도 행복한, 그래서 좋은 삶을 실현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지행 네트워크에서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애써 희망의 논리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보다 근원적이면서도 자기 성찰적인 태도가 요구됩니다. 우리 시대의 실천하는 지식인들과 함께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대화하는 자리’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지행 네트워크는 매월 첫 주 월요일 오후7시마다 “좋은 삶을 말하다 - 생태․자치․예술”이라는 주제의 콜로키움을 개최해 왔습니다. 이번 7월 7일에는 한국여성민우회 공동대표를 역임했고 현재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이신 윤정숙 선생님을 모시고 "시민운동의 상상력, 이분법을 넘어서"라는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가집니다. 요즘 촛불집회가 시민운동의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고 있지만 일상적인 삶 속에서 서서히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다양한 운동의 흐름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작지만 사회를 변화시키는 근본적인 흐름에 관해 대화를 나누는 시간입니다. 여러분의 많은 참여 기대합니다.
■ 일시 : 2008년 7월 7일 오후7시 ■ 장소 : 지행네트워크 (http//jihaeng.net), 02) 823-4926 ■ 지행의 공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참여인원을 20명으로 제한합니다. 선착순으로 신청을 받겠습니다. 참여하실 분들은 댓글을 달아주세요. 그리고 참여비는 없고, 뒷풀이 비용은 그날 참여하신 분들이 분담합니다.^^
4월 7일: 이택광(문화평론가, 경희대 교수) 민족주의 다시 생각하기 5월 6일(화) : 김인택(주산을 사랑하는 사람들 사무국장) 자원순환형 지역공동체 만들기 6월 2일: 김상봉(철학자, 전남대 교수) 함석헌과 씨알사상 7월 7일: 윤정숙(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 시민운동의 상상력, 이분법을 넘어서 8월 4일: 김준기(미술평론가, 부산시립미술관 큐레이터) 시장권력과 미술제도 9월 1일: 이강준(지행네트워크 연구활동가) 에너지 정치경제와 시장 메커니즘 * 지행콜로키움은 계속됩니다. Trackback Address :: http://episode.or.kr/anar/trackback/83
|
||
지행 콜로키움: 시민운동의 상상력, 이분법을 넘어서 :: 2008/06/27 14:03
/분류없음
지행 네트워크 정기 콜로키움 안내
“좋은 삶을 말하다 - 생태 / 자치 / 예술2”
행복한 삶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올바르면서도 행복한, 그래서 좋은 삶을 실현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지행 네트워크에서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애써 희망의 논리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보다 근원적이면서도 자기 성찰적인 태도가 요구됩니다. 우리 시대의 실천하는 지식인들과 함께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대화하는 자리’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지행 네트워크는 매월 첫 주 월요일 오후7시마다 “좋은 삶을 말하다 - 생태․자치․예술”이라는 주제의 콜로키움을 개최해 왔습니다. 이번 7월 7일에는 한국여성민우회 공동대표를 역임했고 현재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이신 윤정숙 선생님을 모시고 "시민운동의 상상력, 이분법을 넘어서"라는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가집니다. 요즘 촛불집회가 시민운동의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고 있지만 일상적인 삶 속에서 서서히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다양한 운동의 흐름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작지만 사회를 변화시키는 근본적인 흐름에 관해 대화를 나누는 시간입니다. 여러분의 많은 참여 기대합니다. ■ 일시 : 2008년 7월 7일 오후7시 ■ 장소 : 지행네트워크 (http//jihaeng.net), 02) 823-4926 ■ 지행의 공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참여인원을 20명으로 제한합니다. 선착순으로 신청을 받겠습니다. 참여하실 분들은 댓글을 달아주세요. 그리고 참여비는 없고, 뒷풀이 비용은 그날 참여하신 분들이 분담합니다.^^
4월 7일: 이택광(문화평론가, 경희대 교수) 민족주의 다시 생각하기 5월 6일(화) : 김인택(주산을 사랑하는 사람들 사무국장) 자원순환형 지역공동체 만들기 6월 2일: 김상봉(철학자, 전남대 교수) 함석헌과 씨알사상 7월 7일: 윤정숙(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 시민운동의 상상력, 이분법을 넘어서 8월 4일: 김준기(미술평론가, 부산시립미술관 큐레이터) 시장권력과 미술제도 9월 1일: 이강준(지행네트워크 연구활동가) 에너지 정치경제와 시장 메커니즘 * 지행콜로키움은 계속됩니다. Trackback Address :: http://episode.or.kr/anar/trackback/82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