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자적 조직화와 인터넷

2004/04/16 09:00
먼저 기성의 사회 제 조직의 무리들을 몰(덩어리)라고 칭하고 싶다. 덩어리의 조직방식은 수직적 위계제랄지, 센타를 갖고 있는 달지의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학교, 교회, 병원, 학생회, 노동조합 이 모두가 이러한 덩어리 상태의 조직방식을 가지고 있다. 이들 무리들은 깃발을 들고 거리에 조직화되어 나타나는 형태로 드러나기도 한다.

두번째의 무리들은 분자들간의 욕망과 소통에 기반한 조직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군중이라고 불러도 되리라. 두번째 조직의 방식은 인터넷을 통해 이루어지는 새로운 방식의 조직화라고 할 수 있겠다. 분자적이기 때문에 이들의 소통에는 매개가 필요치 않다. 그들은 깃발을 통해서 조직된 대중이 아니다.

소통의 직접성에 대해서 설명해 보겠다. 먼저 한 사람이 자본주의의 이윤률 착취방식과 노동해방을 절규하며 선동한다고 생각해 보자. 그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사상과 매개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분자적 대중들은 그것을 욕망하지 않는다. 어떤 또 한명의 사람이 자신의 "편의점 알바를 하면서 얼마나 착취당했는가"를 직접적인 현실에 대하여 자신의 감성에 기반하여 설명한다고 해보자. 분자적 대중들은 금방 이해할 것이며, 직접적으로 그것을 이해할 것이다.

소통의 이러한 직접성은 딴지일보로 일컬어지는 새로운 글문체에도 드러나고, 오마이뉴스의 글쓰기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그것은 진솔하며, 솔직하다. 인터넷에서의 글쓰기와 인터넷을 통한 조직화방식은 바로 소통의 직접성에 기반한 진솔한 감성을 통해서 가능하며, 분자적인 형태의 조직화이다.

그것은 문자문명에 대한 구술문명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구술에 기반한 글쓰기양식은 새로운 감성을 불러일으키고, 새로운 행동양식을 가져다 줄 것이다. 촛불시위, 붉은 악마, 노사모 등의 소용돌이치는 조직화방식은 바로 넷을 기반으로 이루어졌으며, 분자적인 대중을 형성했다.

촛불시위에서 가장 중요한 논쟁중에 하나가 깃발논쟁이다. 깃발을 들고 온 대중과 분자적으로 모인 대중사이에 약간의 알력은 앞에서의 공연을 보고 싶어하는 욕구에 기반해서 깃발내려~를 외치게 만들었다. 왜 하필이면 깃발인가? 그냥 보이지 않기 때문인가? 아니다. 이 깃발논쟁에는 몰적 덩어리 조직화방식과 분자적 조직화방식간의 심원한 차이를 드러내 보인다.

인터넷의 성장이후에 중요한 지점은 분자적 조직화가 몰적 조직화보다 늘 앞서고 있다는 사실이다. 소통은 아주 진솔하며, 재미있고 직접적인 것이 되었다. 이전에 모든 글쓰기는 고루하기 짝이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아주 유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분자혁명이여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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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보그의 존재조건

2004/03/24 09:00

사이보그는 인간-기계간의 이종교배를 통한 잡종을 의미한다.
사이보그는 어디에서든지 존재한다. 기계를 사용하는 인간은 기계의 인간화와 더불어 인간의 기계화를 수반한다.
기계의 피드백 속에서 인간은 기계처럼 반응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하나의 추상기계라고 할 수 있다.

우주를 구분을 하자면 무기체, 유기체, 기계가 있을 수 있겠다.
인간은 유기체로도 존재하지만 기계로도 존재한다. 기계는 인간의 지성의 응집물이다. 기계는 사회적 지성의 보편화된 결과물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도구와 기계를 구분하여야 한다.
도구는 인간의 사용에 달려 있는 단순장치이다.
반면에 기계는 그 사용의 문제가 아니라 소통의 문제이며 피드백의 문제이다.
게임에 열중하는 인간은 게임의 프로그램에 피드백하며
그것을 즐긴다. 그러한 의미에서 게임하는 인간도 사이보그이다.
티비를 보는 인간도 일방적인 형태지만, 정보를 수용하고 즐기며 웃고 피드백한다.
기계의 문을 열고 들어 선 사람들은 사이보그가 된다.

사이보그의 성은 n개의 성이라고 할 수 있다.
사이보그는 결정되어 있는 상태인 유기체의 상태가 아니라 다성성의 n가의 차원으로 진입한다.
사이보그는 신체의 변용양태를 다양하게 드러내 보인다.
그러한 의미에서 사이보그는 신체의 최고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동기계를 다루는 노동자는 자신의 사이보그의 상태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할 수도 있다. 비창조적인 자신의 단순반복 노동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심지어 자동화가 마무리된 단계에서 사라지게 될 자신의 직업을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기계에 의한 인간의 퇴출이 가시화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문제는 부의 재분배의 차원에 있으며, 사회적 지성의 결과물에 대한 공통의 이해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사이보그화된 현 사회에서 노동가치론은 틀렸다.
노동만이 아니라 기계도 사회적 성과물이므로 재분배되어야 할 부분이다. 기계도 가치를 창조한다. 그러므로 기계를 만드는 추상기계인 인간에 대한 보상이 요구되는 것이다.

사이보그의 존재양태에 대한 문제는 다양한 철학적 논의들이 가능하다. 사이보그의 가현실성에 대한 문제 즉, 가상성과 잠재성의 문제가 그것이다. 인간-기계의 사이보그는 새로운 잡종의 주체이며, 미래를 포함한 현실의 존재이다.

사이보그의 잠재성에 대해서 주목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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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과 정보의 이중분절

2004/03/08 09:00
우리는 인터넷을 통해 대화를 나누며, 자신의 의견을 밝히며, 무언가를 알리려 한다. 인터넷은 내용과 표현 사이에 이중분절이 일어난다. 즉, 인터넷을 통한 소통은 늘 코드라는 잔여물을 남기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한다면, 그 사람은 ipadress를 남기며, 완전한 익명이 될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이 채팅을 한다면 그 채팅의 결과물들이 남아서 서버에 잔존하게 된다.

정보와 소통의 이중분절은 내용과 표현의 이중분절, 분자적인 것과 몰적인 것의 이중분절, 영토와 코드의 이중분절과 상응한다. 우리는 소통이라는 영토를 구축하기 위하여 정보라는 코드화로 나아간다.

구술문명의 소통은 소리리듬을 통한 차이와 반복의 형성이다. 그것은 정황에 따라 변화하는 소리영토를 의미한다. 소리영토라는 것은 어두운 밤을 걷는 아이가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흥얼거리는 노랫소리가 만든 영토와도 같다. 소리는 귀에 전달되며, 귀기울린다는 것은 자신을 분열시켜 타인의 입장이 되는 ~되기의 분열의 과정이다.

문자문명에 있어서 인터넷은 또 하나의 구술문명의 복원을 만들어 내었다. 이모티콘과 의태문자를 통한 새로운 영토의 구성의 노력이 여기 존재한다. 그러나 인터넷은 지독한 코드화를 수반하는 문자문명이라고 할 수 있다.

네티즌은 탈코드화되기 위해 코드화를 무릅쓰고도 익명성을 사용한다. 익명은 탈코드화의 잠재능력과 정보인권을 지키고자 하는 방어적 기제이다. 그러나 지배층들은 주민등록번호를 기입하라며, 실명제의 반격을 가한다. 탈코드화가 배제된 코드화는 끔찍스러운 전자감옥과 다르지 않으며, 불임의 영토를 구성하는 텅빈 공간의 재구축이다.

소리영토는 아니지만 문자영토로서의 인터넷은 거대한 바다와도 같다. 어디에서 무엇이 생성될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이 생성의 힘을 포획하기 위해서 지적재산권과 같은 덧코드화 장치, 즉 위계와 중심인 센터구축과 적분을 수행하는 장치가 개발되었다.

인터넷은 소통과 정보, 영토와 코드로 구축되지만 우리가 거부하는 것은 탈영토화와 탈코드화의 잠재력을 가진 인터넷 자체가 아니라 덧코드화로 위계화된 상태일 뿐이다. 덧코드화는 감시와 재산권의 상처로 구성된다.

신은 이중집게이다. 그 이중집게의 진실은 무엇인가? 인터넷 메트릭스 외부가 없는 공간에서 이 이중집게는 어디로 향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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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보바 2004/06/15 09:00 PERMALINKMODIFY/DELETE REPLY

    제가 무지한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리고 죄송스런 말씀입니다만,
    저 같은 사람을 위하여
    글을 좀 더 쉽게 써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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