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의심하다

2004/08/09 09:00

# 1

좀 된 얘기다. 지난 봄에 아이들이과 함께 상추랑 토마토랑 묘종을 사서 길다란 화분에 심고는 그 화분을 베란다 바깥으로 걸린 철제선반 위에 올려놓은 적이 있었다. 그 후 어느 정도 컸는데, 이상하게 잘 자라던 토마토 꼭지가 똑 떨어진데다 상추 하나도 완전히 거의 뽑힐 정도로 뜯어져 없어져 버린 거다. 화분 전체적으로 훼손된 것이 아니라 아파트 베란다쪽으로 길게 훼손된 것이다.

큰애(윤호)가 식물을 그렇게 대할 아이도 아닌데, 작은애(윤하)는 키가 닿지 않아 그럴리 없고. 누가 도둑이 들리도 없고. 그래서 윤호를 불러 넌지시 물어봤다.

"혹시 윤호 너 이거 뜯었니?"

아이를 의심한거다. 윤호는 아무렇지도 않게 안했다고 간단히 대답하고 만다. 그래도 내 의심은 풀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윤하가 의자를 놓고 올라가 위험스런 장난을 했을까. 아냐.. 아냐.. 하여간 아이들에 대한 의심을 풀지 못한 채 그냥 덮어두었다.

그런데 며칠 뒤 그 의혹을 완전히 풀린 것이다. 범인은 바로 비였다. 비가 며칠 계속 왔는데 비가 오면 비가 어디를 타고 흐르다가 떨어지는지 위에서 똑 똑 똑 낙수물이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 낙수물이 상추를 완전히 쪼아서 파버리고, 토마토 윗 부분을 꺾어버린 것이다.

범인은 비였는데, 아이를 의심하다니. 내 스스로 백지에서 사물을 바라봐야 한다고 했는데 나 자신이 그렇지 못했다니. 더군다나 아이를 상대로 말이다. 참, 내 자신이 우습고 부끄러워서 잠시동안이나마 윤호를 제대로 못봤던 기억이 있다.

# 2

그런데 이런 반성은 오래가지 않나 보다. 아니, 어른들은 좀체 버릇을 고치기 힘든 존재라서 잠깐 반성했다가 다시 잊어버리나보다. 어제 일이다. 밖에 나갔다 와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욕조목욕을 시켰다. 녹물을 다 쏟아내고 물을 받아 놓으니 아이들이 안에서 신나게 물장난을 치며 놀았다.

한 10여분이 지났을까. 갑자기 작은애가 와락 울며 목욕탕에서 뛰쳐나오는 것이다. 또 둘이 싸웠으려니 했다. 그런데 작은애 왼쪽 눈에서 피가 물에 번져 흘러내리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랐다.

"어떻게 된 거야. 왜 그래?"
"내가..(울먹울먹) 요.. 물총.. 피하... 숙였는데..요.. 갑자기..(울먹울먹) 눈에서.. 피.. (울먹울먹) 났어요.."

도대체 작은애 설명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큰애가 물총을 가지고 작은애에게 장난을 했다는 것이고 그것이 한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큰애에 대한 야단에 걱정까지 겹쳐 목소리가 대뜸 커졌다.

"윤호야! 어떻게 한 거야! 네가 설명해 봐!"

어떻게 된 거냐고 묻는게 아니라 어떻게 한 거냐고 물었음은 한참 뒤에서나 깨달은 것일뿐 이미 큰애가 어떻게 한 것이라고 짐작을 한 것이다.

"내가요. 마요네즈통에 물을 담아 윤하에게 뿌렸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주저앉더니 울었어요."

큰애는 겁에 잔뜩 질려 얘기를 한다. 내가 마요네즈통 끝이 윤하 눈에 닿은 것인가 하여 마요네즈통 구멍을 살피는데, 아내는 이미 범인은 큰애라 단정하고 큰애를 다그치며 야단을 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작은애가 말린다.

"형이 그런 게 아녀요.(울먹울먹) 그냥 내가 피하려고 앉았는데 피가 났어요."

형이 야단맞지 않도록 두둔하는 정도려니 했다. 아직도 윤하 눈에서 피는 좀 진정되긴 했지만 눈물과 섞여 약간씩 흐르고 아랫 눈썹 안에 생채기도 선연해 다소 걱정이 되었다. 아내는 화장지로 피눈물을 한번 찍어낼 때마다 큰애를 몰아붙였고, 큰애는 죄인마냥 목욕탕 문턱에서 꿇어앉은채 머리를 숙이고 있다.

아무래도 석연치 않았다. 어떻게 된거냐고 재연해보라고 목욕탕 안으로 들어갔는데, 들어가자마자 상황이 짐작되었다. 욕조 안에는 아이들 장난감과 함께 물에 뜨는 돌이 떠 있었고, 욕조 바닥에는 돌가루와 미세한 녹물가루 약간이 침전되어 있었던 것이다. 큰애가 물을 뿌리자 작은애는 주저 앉았고, 그러면서 물이 눈에 들어갔는데, 그 물과 함께 미세한 돌가루가 갔을 터이고, 눈이 불편하니 작은애가 눈을 비볐을 것이고, 그래서 눈 안쪽 약간이 살짝 찢어져 피가 났을 게다.

확실한 원인 규명 없이 엄마, 아빠 둘이서 아이를 밀어붙였다는 게 여간 미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녹물가루 탓이라면 책임은 나에게 있는 것이다. 일단 상황을 설명하고 사태를 진정시켰다. 그러자 큰애가 조그만 목소리로 묻는다.

"내가 잘못한 거예요?"
"아니, 네 잘못은 없지만, 네 책임은 약간 있다."
"동생 보살피지 못해서요?"
"그래."

이 기회에 동생과 같이 있을 때는 네 책임이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 것인데, 말을 해놓고도 가슴 한 구석이 찔렸다. 아마 내 잘못이 더 컸을 텐데도 그것을 아이에게 고백하지 않고서 큰애에게 책임을 느끼도록 했으니...

우리는 보통 아이의 비논리적인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며, 그럴 경우 아이 말보다는 부모의 직관에 의해서 판단하고 행동하곤 한다. 아이의 상황판단을 믿지 못하는 것이며, 간혹의 경우는 아이를 의심까지 하곤 한다.

이 땅에 아이들은 억울한 경우를 많이 당할 것이다. 제대로 자신을 방어하지 못하고, 설명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하지도 않은 일을 한 것처럼 오해받는 경우가 모르긴 몰라도 의외로 많을 것이다.

아이가 했을 것이라고 의심되는 경우, 확인되지 않았다면 일단 물러서는 게 옳지 않을까? 설사 아이가 했을 확률이 높을지라도 그냥 넘어갔을 때의 문제점보다도 억울하게 아이에게 누명을 씌우는 문제점이 몇 십 배 몇 백 배 더 큰 게 분명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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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크아 2004/08/09 09:00 PERMALINKMODIFY/DELETE REPLY

    우리집도 지난 초여름 큰 비가 왔을때 처마 밑에 있던 여러개의 화분에 보기 좋게 자란 얼갈이 배추들이 완전히 아작난 적이 있었는데... 이걸보면 골고루 내리는 빗방울보다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이 훨씬 더 강력한 것 같아요.

  2. 미션 2004/08/09 09:00 PERMALINKMODIFY/DELETE REPLY

    정말... 음... 그러니까...
    미치겠어요.
    아이를 키우는 건 정말이지 세상에서 가장 큰 과제인거 같아요.

    요새 민서가 한약을 먹는데 최근 3주간 먹은 한약은 유독 쓴거였답니다. 보기에도 검은 색이 확연하고, 냄새도 심상치 않죠.
    그걸 아침 저녁으로 아이에게 먹이는데...
    약먹는데 거의1 시간은 걸립니다.
    가끔은 먹다 토악질을 해 먹은 약을 다 쏟아버리기도 하구요.
    또 급한데 약먹기를 거북이 걸음하듯 하면 속이 터지면서 자꾸 압력을 가하게 됩니다.
    특히 사탕줄께, 아이스크림 줄께, 과자 사줄께 해도 듣지 않고 약먹기를 거부할때면... 그냥 회초리에 손이 가고 결국 아이는 눈물 콧물과 함꼐 약을 먹게 되지요.
    그러던 어젯밤...
    아이 앞에 약이 담긴 컵을 놔두고 저랑 신랑은 딴 일을 하다가 갑자기 신랑이 벼락같이 화를 내면서 회초리를 들었습니다.
    뭔일인가 보니, 민서가 약 다먹었어요 하고 약 먹던컵을 씽크대 개수그릇에다 넣은 거예요.
    아이딴엔 감쪽같이 일을 처리한 셈이었겠지만, 개수그릇 안에 검정 약물이 퍼져이었더랬죠.(아이 눈 높이에선 개수대가 잘 안보인답니다.)
    남편은 약을 다 먹지 않고 컵을 물통에 넣은 걸 알수 있었고, 기냥 민서를 패기 시작했죠.
    제가 보기에도 이 참에 혼내지 않으면 이런 식으로 부모를 속이고(?) 약 버리는 짓을 반복할까봐 회초리를 막지 않았습니다.

    민서 다리에 회초리 자국이 더해지면서 민서 얼굴은 불타는 고구마처럼 붉어졌고, 얼굴은 온통 눈물 바다...

    나중에 다리를 보니 멍이 들어있더군요.

    아이가 쓴 약을 먹는 게 얼마나 고통일까요?
    오죽하면 약을 버리기까지 할까요?
    아이의 맘을 어디까지 이해해야 할까요?
    민서는 아마도 자기가 왜 이렇게 맞아야 했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하겠죠?
    아직까지 자기가 잘못한게 없다고 생각하는 걸 알수 있어요.
    그래도 부모니까 잘못한 것을 강제로 인정시켜야 하는 거지요?
    그런거 맞는 거죠?

  3. 페파민트 2004/08/12 09:00 PERMALINKMODIFY/DELETE REPLY

    하................ 아이들 가르치는일이 키우는 일이 참 쉽지가 않은건 맞나봐요. 많은 반성도 하지만 인내를 상당히 요구하기도하고 분석도 하고 아,,,정말 머리아프고 그래요. 옛날말에 애들은 쑥쑥 낳아놓으면 지들끼리 큰다는 말이 왜그리도 내겐 거짓말같은지요. 저번부터 읽으려고 벼르다 오늘에서야 읽고 갑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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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을 서재로...

2004/07/16 09:00
인터넷서점 알라딘에서 서재 공개 이벤트가 있었는데, 여기에 냈던 글과 사진을 실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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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에서 가장 넓고 가장 밝고 또 온 가족이 가장 잘 모일 수 있는 공간인 거실을 서재로 만들었습니다. 물론 방 한구석으로 TV는 치우고, 좌탁을 2개 놓아두었습니다. 언제든지 책을 꺼내 좌탁 앞에 가져와 책을 읽을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물론 거실벽의 공간이 넉넉치는 않아 모든 책을 거실로 끌고 나올 수는 없었습니다. 아이들 방이나 제 방에 책을 약간 남겨두어야 하는 불편도 있었습니다. 다만 아이들이나 우리 부부가 자주 꺼내 읽는 책 위주로 정리를 하여 거실이라는 서재 활용도를 높였습니다.

덕분에 아이들이 1주일에 TV를 1시간도 채 보지 않게된 듯 합니다. 형이 책을 꺼내들면 동생도 책을 꺼내와 옆에 앉는 경향도 있습니다. 큰애는 이제는 아빠 책장에서도 자신이 볼만한 책이 없나 기웃거리곤 합니다.

예전에 어느 학자가 자신의 소양은 어릴적 할아버지 서재에서 싹텄다고 말한 대목이 기억납니다. 아이들의 문화적 소양을 길러주기 위해 부모가 해야 할 것은 아이로 하여금 책을 읽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는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책을 정리하는 노하루라 할 것은 없지만 적어보면 이렇습니다.

1. 정리를 수시로 합니다 : 어른들 책이야 정리 주기가 길어도 상관없지만, 아이들은 빨리 자라는 관계로 정리 주기를 짧게 가져가야 합니다. 아이들이 자라 읽기에 적당하지 않는 책들은 따로 정리하거나 과감히 다른 집에 줘서 아이들 책장이 항상 '현재 읽을거리' 위주로 채워지도록 합니다. 또한 아이들 관심의 경우는 공룡, 역사, 옛날이야기 등으로 자주 바뀌는 경향이 있으므로 아이들 관심 사항의 책을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두기 위해서도 자주 정리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2. 읽은 책은 별도로 표시를 합니다 : 아이들의 경우는 가만히 지켜보면 특별히 좋아하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만 계속 보려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 무리하여 이를 억제시키는 것은 좋지 않지만, 나름대로 지도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봅니다. 따라서 전집의 경우는 읽은 책은 뒤집어 놓도록 합니다. 비디오대여점방식을 차용한 것입니다. 물론 다 뒤집어지면 모래시계처럼 이제는 뒤집어진 책을 읽으며 바로 세워두도록 해나갑니다. 전집이 아닌 경우는 책꽂이에서 읽은 책은 좌측으로 두는 식으로 합니다. 이렇게 골고루 읽도록 하기 위한 표시방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3. 아이들 책과 어른 책을 같은 공간 안에 둡니다 : 위에서 언급한대로 거실이라는 공간을 선택했습니다. 그럴 경우 아이들이 부모의 책에도 관심을 가집니다. 제 관심과 큰애 관심이 같은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제가 산 야생화도감이나 새도감 관련 책의 경우는 어느날 보면 아이들 책장에 꽂혀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는데 부모의 책장이 한 역할을 할 수도 있는거죠. 또 그림이 많은 제 책(예를 들면 동굴에 관한 책)을 아이들이 그림 위주로 보는 경향도 있습니다.

4. 책장을 부부 공동의 공간으로 만듭니다 : 책장을 정리하는 방식은 주제별로 정리하는 방식이 가장 일반적일 것입니다. 우리 역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다만 관심분야의 경우는 정리하는 세목이 늘어나는 정도입니다. 정리하다 보면 부부의 관심사가 다소 틀립니다. 그럴 경우 가장 쉽게 주목을 끌 수 있는 공간인 눈높이 공간에 무엇을 배치하느냐가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집의 경우는 아내가 관심있어 하는 먹거리와 육아서적, 그리고 제가 관심 있어하는 환경분야 등의 책을 나누어 가장 보기 좋은 공간에 배치하고 있습니다. 물론 육아와 환경이 가까이 배치된다는 것이 어색해보일 수도 있지만, 책장이 부부 공동의 공간이라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전혀 어색해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책장이 개인의 개성을 표현하는 한 수단이라면, 가족의 책장에는 가족의 개성이 모두 표현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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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갤러리 2004/07/16 09:00 PERMALINKMODIFY/DELETE REPLY

    우리집 책장은 항상 먼지 투성인데.. 저도 가서 꺼내보고 싶은데요.. ^^

  2. 아야 2004/07/16 09:00 PERMALINKMODIFY/DELETE REPLY

    사진을 보는 순간 오호! 이럴수가...형태네(제 조카)랑 똑같군요. 형태네도 거실이 서재입니다. 제 희망사항 중의 하나입니다. 저도 거실을 서재로 만들고 싶은데 아직 물욕이 많아서인지 잘 안되는군요. 얼마전 안방을 서재로 만들까 목하 고민하다가 혼자서 엄두가 나질 않아 미루었는데 다시 고민 들어가고 싶어집니다.

  3. 라인 2004/07/16 09:00 PERMALINKMODIFY/DELETE REPLY

    부럽습니다.. 더 할말이 없네요. ㅠ,.ㅠ

  4. 페파민트 2004/07/16 09:00 PERMALINKMODIFY/DELETE REPLY

    오호,,,,우리집을 보는 듯한.... 착각!!
    우리집보다 책이 더 많은것 같아 정말 부럽네요. 늘 책속에 살아서 그런지 독서는 많이 못해도 책을 좋아하는.
    존경스럽습니다. 2번과 3번을 읽고 집청소에 다시 신경을 써야겠다는 다짐하나 하고갑니다.

  5. 인디언 2004/07/19 09:00 PERMALINKMODIFY/DELETE REPLY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저도 우리 나은이 크기전에 서재같은 거실을 갖기위해 무지 노력해야 겠습니다.. 좋네요..

  6. 파란하늘 2004/07/19 09:00 PERMALINKMODIFY/DELETE REPLY

    깊이깊이 반성중입니다. 이제부터라도 열심히 책 읽어야지!!글고,저렇게 거실을 온통 책장으로 맹글고 싶은 커어다란 집이 하나 있음 좋겠슴다-_-;;;; 쿨럭...주제와 안맞는듯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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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happy) 해! 앵그리(angry) 앵!"

2004/06/28 09:00

요즘 만화 형식을 빌린 학습서가 유행이다. <그리스로마신화>를 통해 한번 광풍이 불더니 요즘에는 <마법천자문>이 또 휩쓸고 있다. 대형서점에 가도 학습만화코너 앞에는 책 읽을 자리 잡기가 어려울 정도다. 우리집도 <그리스로마신화>의 광풍은 이런 저런 핑계 대고 피해갔지만, <마법천자문>은 결국 한 권이긴 하지만 아이들에게 안겨주지 않을 수 없었다.

학습만화 효과는 일견 대단하게 보인다. 우리집 둘째 나이가 여섯살인데도, 큰애랑 제법 마법천자문놀이를 하며 어울려 논다. 빛 광, 물 수, 불 화, 막을 방, 깨뜨릴 파, 얼음 빙, 바람 풍 등을 구사하며 큰애에게 제법 몇 합 정도 대응하는 것이다.

그래도 물론 작은애는 큰애의 대적상대는 되지 못한다. 큰애는 작은애가 구사하지 못하는 한자인 "죽을 사" 등을 써서 간단하게 제압하거나, 때로는 "착할 선" 등을 써서 상대방이 착해져야 한다고 그래서 공격하지 말아야 한다고 동생을 어리둥절하게 몰고가기도 한다.

어쩌면 작은애의 최대의 무기는 놀이의 방식을 무시하고 자기 나름의 방식대로 밀고나가는 것일 수 있다. 한번은 공세에 밀린 작은애가 이렇게 대적한다.

"해피(happy) 해!"

옆에서 포복절도하는 우리들을 무시한채 작은애의 두번째 파상공격이 이어졌다.

"앵그리(angry) 앵!"

이 두 방에 큰애는 간단하게 제압되고 말았다. 웃느라 방어나 공격을 못한 것이다.

작은애가 이러한 만화나 놀이를 통해 한자 몇 자 정도는 쉽게 익히게 된 것이 물론 처음에는 신기했다. 그러나 그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개운하지 않은 게 사실이다.

학습만화라는 게 이득보다는 폐해가 훨씬 많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리스로마신화>만 해도 그렇다. 당장은 신화에 대한 흥미를 쉽게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신화의 깊이를 느끼는데 크게 제약요인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신화를 흥미위주로 접근하는 것도 그렇고, 언제까지 만화에 의존하여 신화의 세계로 걸어갈 수 있을지 의문이고, 결국에는 책을 읽는 습관이나 재미를 방해할 듯 싶다. 또 책에는 해석의 여백이 있지만 만화에는 그것이 적다는 점도 있을 것이다. 실제 근육질의 남성 신과 요염한 여성 신을 그림으로 나타내고 있는데 이는 얼마나 아이들에게 잘못된 이데올로기를 전달할 것인가.

<마법천자문>도 그렇다. 물론 당장 한 자 몇 자 익히는데는 좋을지 모르겠지만, 언제까지 만화에만 의존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한자를 떠올릴 때 전투적인 의미로 떠올려야만 한다는 것도 그리 유쾌하지는 않는다.

이미 이러한 것이 하나의 흐름이 되어 있고 아이들이 즐겁게 받아들이고 있어 끊이없이 주변에서 "해피 해"로 받아들일 것을 주문하지만, 내부에서는 그러한 흐름에 계속 "앵그리 앵"해야만 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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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라인 2004/06/29 09:00 PERMALINKMODIFY/DELETE REPLY

    '해리포터'가 생각나는군요.
    연주는 영화를 보고 실망했다..하더이다.
    눈으로 보는것이 상상하는것보다야 부족함이 많지만..
    그래도 저는 만화를 좋아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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